디지털이 없는 트레이더 조, PM이 배워야 하는 이유

'우리는 다르게 팝니다'를 읽고

by 경민 Product Guy

들어가면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늘 프로덕트 전략을 고민해왔다. 예전에는 기능 단위로 로드맵을 잘 짜고, 지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전략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무를 계속하다 보니,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됐다. 프로덕트 마케팅 관점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장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이미 비슷한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정말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 제품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PM으로 일하다 보면, 기능은 분명 잘 만들었는데도 사용자가 선택하지 않는 순간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단순히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trader_joe.png Trader Joe


결국 고민은 자연스럽게 세그먼트와 포지셔닝으로 이어진다. 이미 자리 잡은 대안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어떤 사용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니즈를 더 잘 해결해줄 수 있는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로드맵도 힘을 잃고, 지표 역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런 경험들을 거치면서, 지금의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꼭 필요한 역량 중 하나가 바로 프로덕트 마케팅 관점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게 됐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오히려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온라인 채널조차 운영하지 않는 브랜드, 바로 Trader Joe’s다. 디지털 채널도 없고, 퍼포먼스 광고나 개인화 추천 알고리즘도 없다. 요즘 리테일 문법과는 정반대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더 조는 독보적인 팬덤과 높은 충성도를 만들어왔고, 지금도 꾸준한 비즈니스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트레이더 조는 PM에게 생각보다 훨씬 많은 힌트를 던져준다.




STP를 전략이 아닌 운영 원칙까지 가져온다


많은 프로덕트 매니저가 사용자 세그먼트를 정의할 때 여전히 인구통계학적 기준에 머무르곤 한다. 나이, 성별, 지역처럼 정리하기 쉽고 설명하기 편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실무를 하다 보면 금방 한계를 느끼게 된다. 같은 ‘30대 남성’이라도 어떤 문제에 민감한지, 무엇을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는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부 플랫폼을 구축할 때 사용자를 막연히 ‘마케터’라고 정의했다가, 몇 차례 사용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크게 반성한 경험이 있다. 같은 마케터라도 역할, 목표, 일하는 맥락에 따라 제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필립 코틀러는 시장 세분화를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유사한 ‘욕구’를 가진 집단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그 욕구를 어디에서 찾느냐이다. 트레이더 조는 가격이나 편의성 같은 표면적인 기준이 아니라, 소비자의 가치관과 태도에서 그 답을 찾았다.


트레이더조.png 트레이더 조의 소비자 세그먼트


트레이더 조는 고객을 나이와 성별로 나누는 대신, 심리·가치·태도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세그먼트로 정의한다. 사회적 의식, 가성비에 대한 태도, 탐험가적 기질, 건강 가치, 놀이와 참여. 이 다섯 축은 “누가 살까?”라는 질문보다는, “왜 이 사람은 트레이더 조에서 사야 할까?”라는 질문에 훨씬 가까운 기준이다.


중요한 점은 이 세그먼트 정의가 문서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곧바로 상품 전략으로 이어진다. 제한된 SKU, 높은 PB 비중, 건강·환경 가치를 담은 제품 구성, 예상 밖의 조합을 시도하는 신제품들은 모두 특정 라이프스타일 세그먼트를 명확히 상정한 결과다.


이 영향은 매장 운영과 구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온라인 채널을 두지 않고 오프라인 매장을 경험의 중심으로 설계한 것, 리테일 미디어 대신 직원과의 대화를 정보 전달의 핵심 수단으로 둔 것, 일부러 진열을 바꾸며 발견의 재미를 만드는 리머천다이징 전략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는 효율 극대화보다는 탐험과 놀이를 중시하는 세그먼트의 특성을 전제로 한 운영 방식이다.




트레이더 조는 대형몰과 경쟁하지 않는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트레이더 조는 대형몰이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영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재고의 연속성, 수많은 상품들, 알고리즘 기반 효율 등 대형 유통사가 강점을 가지는 이 영역에서 트레이더 조는 정면 승부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반대편, 작음·불연속성·불확실성 등 사람냄새 나는 영역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1) ‘선택의 역설’을 해결하는 큐레이션


트레이더 조는 월마트 대비 약 3% 수준인 4,000여 개의 SKU만 운영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운영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 인지 부하를 낮추기 위한 UX 전략에 가깝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사용자는 더 만족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고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지고, 선택 자체가 피로해진다. 트레이더 조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우리가 대신 골라주겠다”는 큐레이션의 태도를 전제로, 사용자는 선택하지 않은 것보다 선택한 것에 더 큰 신뢰를 느끼게 된다.


(2) ‘발견의 즐거움’을 설계하는 전략적 불편함


트레이더 조의 재고는 늘 불연속적이다. “있을 때 사세요(While it lasts)”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판매 압박이 아니라, 제품 발견 경험을 이벤트로 만드는 장치다. 여기에 더해 매장 진열을 수시로 바꾸는 리머천다이징은, 사용자가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전략은 디지털 서비스의 개인화 추천과는 정반대다. 알고리즘은 예측 가능성을 높이지만, 트레이더 조는 의도적으로 낯섦과 우연성을 남겨둔다. 탐험가적 기질을 가진 세그먼트에게 이 불확실성은 오히려 재미가 된다.


(3) PB 중심으로 통제 가능한 사용자 경험 구축


트레이더 조 제품의 80% 이상은 PB다. 이는 단순한 마진 전략이 아니다. 품질, 원재료, 패키징, 가격, 스토리까지 엔드투엔드 경험을 직접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다. 대형몰이 브랜드와 제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에 손글씨 상품 설명, 직원의 비정형 커뮤니케이션 같은 요소들이 더해지며 자기참조 효과가 발생한다. 소비자는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서사에 맞는 선택을 했다고 느끼게 된다.




PM이 배워야 할 것은?


트레이더 조 사례가 PM에게 주는 가장 큰 인사이트는 분명하다. 작은 프로덕트가 반드시 큰 프로덕트와 같은 문법으로 경쟁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트레이더 조는 명확한 STP와 자신의 상황을 기준으로, 어떤 상품을 만들지, 무엇을 과감히 팔지 않을지, 그리고 어떤 채널과 경험에 집중할지를 일관된 의사결정 기준으로 삼았다. 그 결과, 제한된 선택만으로도 뚜렷한 차별화와 높은 충성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대형 플랫폼의 강점은 규모와 선택지, 효율과 자동화에 있다. 하지만 그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면 작은 프로덕트는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트레이더 조는 대신 대형몰이 구조적으로 하기 어려운 선택을 반복해왔다. 제한된 SKU, 불연속적인 재고, 사람 중심의 정보 전달, 그리고 탐험과 발견을 전제로 한 경험 설계. 이 모든 것은 ‘더 잘하기’가 아니라 ‘다르게 하기’를 택한 전략이었다.


PM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 제품이 작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작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 모든 기능을 갖추기보다, 특정 사용자에게 분명히 기억되는 제품을 만드는 순간, 경쟁의 룰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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