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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 Oct 25. 2019

아직도 처음 보는 것이 많다

처음 보는 곤충의 습격

강화도의 시골집으로 이사를 와 며칠이 지나자 눈에 조금씩 들어온 것이 있다. 문지방과 문틀에 저마다 붙어 있는 셀로판테이프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자그맣고 기다란 구멍들. 울산에 살던 19년과 서울에서 살던 11년 동안에는 구경도 못해본 것들이었다. 아마도 나왕일 가능성이 높은 노란 나무 문틀의 무늬들 사이로 파여 있는 구멍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사막에 남은, 물이 흘렀던 흔적처럼 오랜 세월을 가늠하게 해 주었지만 도통 이 구멍들이 어떻게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삭은 것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5월 말쯤이 되자 날씨는 제법 덥고 습해졌다. 습도계는 50 퍼센트를 훌쩍 넘어가는 숫자들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나는 괜한 욕심으로 여섯 대나 들여놓은 기타들이 걱정됐다. 사실, 기타라는 물건은 그렇게 무르지 않아 여름이 오기도 전에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혹여나 그중 뭐 하나라도 습기에 뒤틀리게 되면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화끈한 정신과 벌이를 갖춘 록스타가 아닌 내게는 대단히 큰 손실이다. 게다가 오래된 악기를 선호하는 기이한 취향을 가진 나의 악기 중 절반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제작된 연로하신 악기다. 더욱 신경을 써드릴 수밖에. 이처럼 나같이 '악기 건강 염려증'을 앓고 있는 방구석 기타리스트에게 극단적으로 습하고 극단적으로 건조한 습도를 오가는 한국의 사계는 참 골치가 아프다.


그간 창고에 놓아둔 제습기를 꺼냈다. 이 집은 들여다볼수록 어떻게든 무언가 만들어내서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가 엿보이는데, 원래는 실외였던 곳에 판자 몇 개와 양철 지붕으로 만들어 놓은 창고도 그중 하나이다. 툭 쳐도 붕괴할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용케 비가 새지도, 바람에 쓰러지지도 않는 그 창고 덕에 자취 인생 처음으로 쓰지 않는 물건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정리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최소한 십 수년은 되었을 과거에 '이곳에 창고를 만들어야겠다'라고 다짐한 솜씨 좋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보낸다.


여하튼 제습기를 악기 방 앞에 두고 목표 습도를 45도로 정해놓았다. 한 여름이 아님에도 하루 종일 부지런히도 돌았다. 제습기에 장착된 조그만 물통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동네 철물점에서 호스와 빨간색 고무 물통을 사 와 연결해놓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물통이 가득 찼다. 과연 먼저 이곳에서 살던 이들의 조언대로 강화의 습기는 일찍부터 만만치 않았고 나는 내 기타들의 건강을 위해 습도계를 언제나 예의 주시했다.




어느 금요일, 집에 들어오니 문지방과 장판의 틈에서 날개가 달린 까만 개미들이 기어 나와 득시글 거리고 있었다. 어떤 전조도 없었고 불과 출근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풍경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보이는 개미떼가 그렇게 낯선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동요 없이 청소기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조금 들여다보니 개미가 아니었다. 개미보다 배 부분이 더 길고 머리의 모습도 조금 달랐다. 급히 폰을 꺼내 검색을 해보았다. 흰개미였다.


흰개미? 미국 영화에서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걸 본 것 같은 기억만 있는 그 곤충이 왜 이 집에, 그것도 이렇게 잔뜩 나오는 거지? 게다가 이 집은 분명히 빨간 벽돌집인데 나무가 주식인 흰개미가 이렇게 많이 살 수 있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울리는 와중에 다시 본 흰개미 떼의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었다. 처음 보는 생물과 맞닥뜨렸다는 것과 이들이 어떤 행동을 앞으로 해나갈지 모른다는 사실은 마음의 여유를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게다가 둘씩 짝을 지어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의 꼬리를 물고 줄지어 가는 모습이라니... 누가 봐도 번식을 위해 짝을 지은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집이 흰개미의 소유가 되기 전에 서둘러 그들을 청소기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흰개미 청소는 무선 청소기를 두 번이나 충전하고서야 끝날 수 있었다. 흰개미가 기어 나오는 입구를 추적하다 들춰본 장판 밑 그들의 세계는 더욱 점입가경이었는데 '빙산의 일각'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절감한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제야 문틀에 나 있는 구멍이 어떻게 난 것인지, 왜 테이프로 막아놓았던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구멍은 흰개미가 갉아먹은 흔적이었고 테이프는 흰개미의 세계를 완전파괴하는 것에 실패한 인간의, 서로의 눈에 띄지는 말고 살자는 일종의 정전협정이자 휴전선이었던 셈이다. 


문지방에 난 흰개미의 흔적들. 어떻게든 그들을 막아보려는 테이프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다.


이후 흰개미는 습한 환경을 좋아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흰개미를 박멸하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정전협정을 조금 강화해 비어 있는 구멍들과 장판이 끝나는 부분을 테이프로 꼼꼼히 막는 것과 제습기의 목표 습도를 45도에서 40도로 낮추는 것 정도였다. 물론 조그마한 제습기 하나로 집이 바스러지게 건조해지지는 않았고 이후로도 종족 번식의 사명감으로 어떻게든 그 작은 틈을 뚫고 비어져 나오는 흰개미들은 있었지만 어쨌든 우글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집에 터를 잡았을 원주민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신대륙의 원주민을 탄압하는 것도 인간의 오랜 본성 아니겠는가. 


흰개미와 씨름하고 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일찍부터 제습기를 돌린 목적이었던 기타들을 살필 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기타들에는 뒤틀린 흔적도, 흰개미들이 갉아먹은 구멍도 없었다. 뭐 이쯤 되니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판에 그까짓 기타에 구멍 몇 개쯤 있으면 어떤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아직도 나는 처음 보는 것들이 많고, 그 미지의 세계는 종종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이런 작은 소동을 겪고 나면, 그 미지와의 조우가 나를 깜짝 놀래키기는 해도 무탈히 흘러가 새로운 경험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은 생긴다. 나 같이 겁이 많고 주제넘게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에게 이런 경험은 도움이 된다. 밴드 동료인 홍콩 친구에게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termite'라는 단어를 배운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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