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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 Oct 30. 2019

"술을 많이 먹어요. 어쨌든 도움이 돼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에서 주량도 모르면서 겁대가리 없이 글라스에 따라 연거푸 들이켰던 소주가 선사해준 지독했던 숙취가 큰 이유지만 이후에도 술을 마실 때 찾아오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몸의 변화들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만취한 채 휘청대거나 막말을 하는,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필요 이상으로 싫어했다. 술을 마셔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안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왜 무언가를 하는 데 술의 힘을 빌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렇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재수 없는 놈이었다.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과 그래야만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으로 가득했다. 더 재수 없는 건 잔뜩 취한 사람들을 수습해 차에 태워 보내는, '무너지지 않는' 나의 모습에 도취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강인함에 대한 과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 대한 엄격한 기준으로 꼬장꼬장했던 내가 술에 의지해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는 사람이 되거나, 그렇게 될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눈을 뜨면 냉장고에 있는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랐다. 달콤하고 떫은맛을 즐기는 첫 잔,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두 번째 잔을 거푸 들이키고 나면 조금 살만했다. 여전히 잠을 푹 잘 수는 없었고 싸르르 가슴을 쓸어내려오는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기분이 그냥 '힘들다'정도로 변했다. 얼굴에 올라온 후끈한 느낌과 함께 드러누워 나는 망가졌고 앞으로 망가진 채 살아가겠구나 자학하다 보면 하루는 흘러갔다. 처방받은 SSRI의 복용에 알콜이 크게는 상관없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지만 여전히 밤이 되면 다음날 눈을 떠 또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그 기분을 지우는 데 처음엔 한 캔으로 충분했던 500ml 맥주는 이내 두 캔이 되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 네 캔이 되었다. 네 캔의 맥주는 이따금 알콜 냄새가 난다며 싫어했던 소주가 되기도 했고, 자주 가던 이웃 가게의 와인이 되기도 했다. 만취에 이를 정도로 술을 견디지는 못하는 몸이라는 게 참 다행일 정도로 매일 마셨다.


그런 시간이 2년이 넘어가자 가끔 일자리를 위해 신체검사를 해야 할 때면 우습지만 걱정이 되었다. 마음 따위야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하겠기에 최소한 그 전날 정도는 술을 마시지 않을 얄팍한 정신은 남아 있었지만 짧지 않은 시간 매일 술을 마셔왔고 몸이 괜찮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사가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결과는 항상 좋았다. 병원에서 공인한 셈이니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고, 업무상 야근이 잦았다.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 밤 아홉 시 반에 퇴근하는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거기에 수업 준비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몇 달 지나지 않아 지치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생활이었지만 규칙적인 혹사였다. 이제 조금 나아졌나 했는데 벌써부터 방전되어버리는 스스로가 싫었다. 저마다 고되겠지만 남들은 30년씩 하는 일이 왜 벌써 힘든 건지. 새 마음 새 뜻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한동안 멈추었던 술 마시기를 시작했다. 강화의 밤은 길었고 조용했고 술 마시기에 좋았다.




2015년 파리에서는 1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바타클랑 테러'가 일어났다. 현장에서 공연을 하던 밴드 'Eagles Of Death Metal' 이 다시 파리로 돌아가 공연을 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 : 바타클랑 그 후'를 보면 그 비극을 대면하는 여러 사람을 볼 수 있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견뎌내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던 중에 한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특히 이 말이 그랬다.


"요새는 술을 많이 마셔요. 어쨌든 도움이 돼요."


사실 난 이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견뎌내려는 시도를 해보고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와중에 운 좋게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그 과분한 말의 무게에 조금은 꾸준히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갈지, 이것이 내 상태를 좋게 만드는 데에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물론 파리의 공연장에 있었던 이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게 견디기 힘든 순간들은 또 올 것이고 그 순간들은 대부분 특별한 이유 없이도 불쑥 찾아올 거라는 것을. 그래서 의심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어떻게든 천천히 해나가려 한다. 그래도 힘이 든다면 이제는 나를 망가뜨린다거나 하는 생각에 도취되지 않고 편하게 마시려 한다. 완벽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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