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날들』 멈춥니다

2세대 회고록 미드로그

by 꼭두

『그의 날들』 멈춥니다

2세대 회고록 미드로그


새길 찾기


'하늘님께 드리는 그의 회고이유서'라는 제목으로 '항소장'을 제출한 지 제법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제게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항소장은 그 시작을 많은 분께 알리며 제 마음을 다지는 일이었죠. 알고 보니 엉망이었던 하늘님의 재판과 형량을 거부하고 나서는 길입니다. 항소장은 그 길의 '출사표'인 셈이네요.


제갈량은 위나라를 치러 떠나기 전 왕에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에서 이렇게 말했다죠.


'임표체령(臨表涕零)'


"신은 본래 포의의 몸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 갈며 구차하게 난세에 생명을 보존하려 하였을 뿐, 제후에게 알려져 영달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고민했습니다.


오랜 복기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지난 1년간 좌절만 반복했던 제 길은 시작부터 잘못 선택한 이정표였다는 사실이었죠. 어떻게든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더 세게 다진 후, 다시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또 좌절이 예정된 길.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방법으로 아무리 노력해 본들 내 아들 잠자리 하나라도 찾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에 도착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아들의 나홀로 아빠가 됐을 때는 자폐의 '치료 교육' 공부였는데, 이번에는 자폐의 '복지 지원' 공부였어요. 여기저기 물어봐도 말도 다 다르고, 하다못해 AI도 검색해서 말해주는 근거가 계속 틀리길래 이번에도 나홀로 고시 공부를 했죠.


'대한민국헌법'을 시작으로 '장애인인권헌장', '서울시장애인인권증진에관한조례'를 거쳐 '장애인복지법'까지 샅샅이 훑었어요. 장애인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바이블이자 실무지침서라는 600쪽짜리 '장애인복지시설사업안내'도 꼼꼼히 읽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 길이 있었습니다. 비록 글이지만 말입니다. '글이 현실이 될 수 있으려나? 법과 지침이 현실이 되는 나라던가?' 싶었지만 해야죠.


허구의 가상현실인 영화 속 시나리오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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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을'에서 당당한 '갑'으로


결심했습니다.


더는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읍소하는 '을'이 되지 말자. 잔뜩 주눅 든 모습으로 아무리 애원해 본들 하나뿐인 아들의 잠자리 하나 내주지 않으니까요. 얼마든지 더 비굴해질 수 있지만 그래봤자 외면만 당할 뿐이니까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의무라는 국민의 최고 인권이며 기본 인권인 생존권을 요구하자. 복지서비스 제공 의무자인 국가라는 '을'을 상대로, 복지서비스 소비 권리자의 요구를 주장하는 당당한 '갑'이 되자.


제 현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설 연휴 아들과의 5박 6일 돌봄 전투를 마치자마자 2월 19일 아산병원을 찾아 진단서를 새로 발급받았습니다.


소견란에 “기대여명은 수개월”이라고 적혀있던 2025년의 진단서가 아닙니다.


"기대여명 경과. 항암주사 중단. 환자의 자폐장애자녀 돌봄과 방어가 의학적으로 불가능. 전문적 격리보호가 필요함."


소견란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어봐도 제 아들은, 보건복지부가 만든 실무지침서에 명기된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긴급이용자'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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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저와 제 아들의 관할 지자체인 강동구청에 '공적보호조치 이행촉구서'를 접수했습니다.


'갑'이 걷기 시작한 새 길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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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빠르게 폰이 울렸습니다. 그건 힘든 일이라며 대신 할 수 있는 임시 조치를 해주겠답니다. 저는 임시 조치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이미 한참 넘어선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길의 출발이 저와 다릅니다. 긴급이용자는 아니라고 판단된답니다. 외국어를 번역한 것도 아닌데 왜 해석이 다를까요?


"지자체장은 긴급한 시설수요 발생 등 특별한 사유가 인정되면 시설의 정원을 초과하여 이용장애인을 운용할 수 있다." - 보건복지부 실무지침서 40쪽


지침서 문구 원문입니다.


왜 공무원은 지침서 40쪽에 명기된 "운용할 수 있다"를 "운용할 수 없다"로 읽어내죠?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와 공무원이 함께 보고 있는 글은 한글입니다.


그나마 공무원의 오독이 말이 되려면 긴급이용자에 제 아들이 해당되지 않아야 합니다.


“긴급이용자는 인권침해상황 발생 시 구제조치를 실시해야하는 이용자, 갑작스런 사고 등으로 인해 무연고가 된 이용자 등이다.” - 보건복지부 실무지침서 43쪽


촉박한 시일 내에 사망이 확정됐다 하더라도, 사실상 사망이라 하더라도, 아빠의 죽음이 채 완성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제 아들이, 생존권이라는 최고의 인권 침해상황이나 무연고 이용자로 완성되지 않았단 말이 됩니다. 이렇게 잔인한 해석이 가능한 일인가요?


더구나 복지행정의 기본은 예방복지이고, 복지의 사각지대를 찾아내는 게 원칙이라는 자칭 복지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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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실화탐사대가 마련해 준 시린 봄 색깔 꽃다발


2월 26일, 제가 '써니'라고 부르는 까치가 깍깍거리며 귀곡산장의 아침을 깨웁니다. 그 울음소리를 따라 언론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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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아들 살 곳만이라도 찾아주고 떠나고파” 2026.3.2 세계일보 바로가기


세계일보 기사는 인터뷰 그대로였지만, MBC 실화탐사대의 방송 콘티는 뜻밖에도 브런치에 3개월 동안 써 올린 90여 화(話)의 제 회고록이더군요. 촉박하게 압축한 촬영이 이어집니다.


누구에게도 구차한 모습 보이기 싫어 아무에게도 안 알렸다던 놈입니다. 3월 12일 목요일, 프라임타임인 저녁 9시에 30분간 방영된답니다. 아주 많이 어색하더라고요. 제 삶을 보여드리려고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거 꽤 힘드네요.


병들고 초라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이죠.


PD가 묻습니다. 아버지 삶을 정리하는 모습도 담겠다고. 정리하고 싶은 게 있지 않았냐고. 지금 그림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아들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저 역시 소소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아들 살길 찾는 마지막 숙제가 끝나지 않아 다 포기했다고 답했습니다.


지나가는 말처럼 빈소에 놓을 제 마지막 사진 찍는 것도 이제 뜻이 없다 했는데, 함께 해줄 테니 그거 하자네요. 하소연만 이어가는 것도 지쳐가던 터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MBC 덕분에, 포기했던 거 늦게라도 마련해 두는 셈이구나 싶어서요.


사실은 필요 없는 일이다 생각했었어요. 간혹 그런다는 사람들처럼 저는 제 장례식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할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짚어보니 그건 제 몫은 아니더라고요. 딸이 결정할 일 같았어요. 그 아이가 필요하다 판단한다면 내가 막을 수 없겠더군요.


떠나는 것도 그다음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하하.


봄비가 옵니다.


사진관 예약한 날을 하루 앞두고 머리를 잘랐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사우나도 다녀옵니다.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거리의 어느 꽃집, 일꾼 둘이 비를 맞으며 한참 꽃을 다듬고 있습니다. 한 다발 푸짐하게 묶어달라 했습니다. 노란 장미와 프리지어에 하얀 안개꽃도 잔뜩 넣어달라 했죠.


저는 빈소에서 사진 아래 받아 쌓을 하얀 국화가 싫었어요. 살아있는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리게 샛노란 봄 색깔의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받고 싶었죠. 나중에 사진관 사진사가 그러더군요. 꽃다발 든 영정사진 찍어보는 것도, 그 꽃을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온 것도 처음이라고요.


덕분에 웃으면서 찍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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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날들』 1권 마침


꼭두의 회고록 『세 사람의 날들』 2부 『그의 날들』을 미드로그까지 모두 28화를 끝으로 1권에서 잠시 멈춥니다. 브런치의 e북은 어차피 한 권당 30화를 넘길 수 없더군요.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연재요일 약속을 꽤 여러 날 동안 지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권력을 상대로 한 나홀로 '갑'의 싸움 시작과, 곧바로 이어진 언론 인터뷰와 촬영에 손과 입과 몸이 묶여 있었거든요. 죄송합니다.


회고이유서를 포함해서 아들의 살길을 찾는 새로운 기록은 3부 『아들의 날들』에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그동안 한 달 정도 삶의 간격을 두고 기록을 이어갔는데 앞으로는 실시간으로 말씀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의 날들』 2권은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들의 날들』을 마치고도 제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글 쓸 힘도 남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3부 『아들의 날들』이 행복한 마침표를 찍고, 2부 『그의 날들』 2권을 기록할 힘이 제게 여전히 남아 있기를 욕심부려 봅니다.


송구하지만 저와 제 아들과 제 기록을 지켜보시는 분들에게도 격려와 축복을 부탁드리며 『그의 날들』을 1권에서 잠시 멈춰 세웁니다.


고맙습니다.


2026년 3월 7일

꼭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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