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나와 아버지
※ 이 글에는 정신질환의 증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폭력성 있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절망감을 똥처럼 싸지르는 것만으로 무언가 도움이 될까? 예술적으로 잘 싸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겠지? 그런데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공대생이라 어쩌면 좋나…. 그래도 혹시 숨어있던 한 포기 예술인의 혼이 깨어날지 모르니 노력해 보겠다.
인생을 평탄하게 살아온 25살 공대생 5학년(졸업유예생)이다. 2년 전 조현정동장애가 터졌다. 치료받고 있었는데 근래 다시 재발했다. 가정환경은 뭐 쏘쏘(soso)하다.
아마 대한민국 평균에 해당하는 장녀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럼에도 조현정동장애에 걸린 이유는… 내가 조금 예민한 것 같다. 유리멘탈이고, 여리고, 그게 아니면… 의지력이 약해서…? 태어나길 정신병자로 태어나서?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병이 악화한 계기들을 보면… 정말 별게 아니다. 스스로 의문이 들 정도로.
처음 조현정동장애가 터지고, 2년이 흘러 아주 안정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이롱환자'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병식이 있는 데에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내가 기필코 성공해서, 조현병이나 조울증 환우들에게 희망을 전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다. 내가 뭐라고… 주제넘게 "당신도 할 수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단 말인가. 내 병의 악화는, 하늘에 닿으려고 밀랍으로 된 날개를 만들었던 이카루스처럼, 건방진 꿈을 꾸었던 나에 대한 벌인 지도 모른다.
조울증이 악화하기 2주 전, 편두통이 너무 심해 신경과에 찾아갔다. 그냥 두통이 아니라, 시야에 이상한 게 보였다. 눈앞에 번쩍이는 빛 무리가 보였다고나 할까? ChatGPT에게 말하니 그냥 두어선 안 된다고 된통 겁을 주는 바람에 병원을 가게 됐다.
가서 여러 검사를 받으니, '조짐성 편두통'일 가능성이 높단다. '토피라'라는 편두통 예방약을 주셔서 받아먹었다. 공교롭게도, 이 약을 먹기 시작한 직후부터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내겐 기계식 키보드를 만지는 취미가 있다. 뜬금없이, 무려 '손 윤활'이 하고 싶어졌다. 최소 3시간을 투자해서 스위치 부품을 일일이 기름칠 해야 하는 미친 짓이다. 이 비이성적인 충동으로 인해 윤활 키트를 샀다.
유튜브를 보니 선크림을 바르면 반드시 2차 세안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에는 클렌징 오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클렌징 밀크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대용량 클렌징 밀크를 샀다. 리필 팩까지 들어있는 것으로.
여름이 끝나 추웠다. 기모 바지가 갖고 싶어졌다. 샀다. 두 벌이나.
저녁에 남자친구랑 데이트하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당장 뭐라도 해서 이 뜨거운 열정을 털어내고 싶었다. 도시락을 만들기로 했다. 장을 보러 갔다. 햄과 참치, 김, 김 펀칭기, 마요네즈를 샀다. 집에 와서 막상 만들려니 재미가 없었다. 건성건성 만들었다.
다 경조증 증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 하찮은 증상이 아닌가. 병원에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접수처 직원이 물어보겠지.
"어쩐 일로 예약일보다 일찍 오셨어요?"
"제가 도시락을 만들었어요!"
너무 하찮지 않은가! "도박에 손을 대서 풍비박산이 나버렸어요.", 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예약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참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다.
엄마가 대충…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하소연했다. 가족 모두가 아버지에게 직접 항의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맨날 술을 드시는데 이건 심각한 일이라고. 또… 뭐라고 더 말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아버지의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이 너무 심해 보이니 정신건강의학과에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병원 권유를 할 막중한 임무는 내가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어려웠다. 아버지에게 "다녀오셨어요?" 한 마디 하는 것조차 조금 떨렸다. 그럼에도 구국의 결단을 내려 하기로 했다. 다름 아닌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버지에게 병원을 가보라는 말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나의 가장 똑똑한 친구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아버지의 특징에 대해 쭉 나열한 리스트를 프롬프트에 입력하며,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물었다.
지극히 합리적인 답변을 받았다. 아버지는 원칙주의자에 자존심이 센 사람으로 보이니, 절대로 아버지가 '이상해서' 또는 '아파 보여서' 병원에 가자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대신, 정기 검진처럼 건강을 체크해 볼 겸 가보라고 제안해보라고 했다. 그대로 따랐다.
"아버지,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 것 같은데, 병원 가셔서 간단한 스트레스 검사 받아보시는 거 어떠세요~?"
"너나 받아."
너나 받아. 아직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남자어'라는 걸까? 아무런 뜻도 없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걸까?
당시에는 차에 치인 충격과 같이 느껴져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얼얼했다. 말대꾸는커녕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혹시 가정에서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냉대하시는 걸 수도 있어, 내가 먼저 사랑을 보여드려야지.'
생각해서, 수개월 동안 꾸준히 건넸던….
"다녀오셨어요?"
"다녀오세요."
"오늘 혹시 힘든 일 있으셨어요?“
나의 모든 인사를 빵 차버린 것이다.
'응, 나는 네가 준 성의 같은 거 몰라. 네가 해준 걱정 같은 거 몰라.'
일말의 애정도 아버지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선하게 보였다.
아버지와 내 관계가 더 나아지려면 뭘 더 해야 했을까? 뭘 고쳤으면 더 좋아졌을까? 답을 알 수 없게 됐다. 원래는 '내가 조금 더 살갑게 인사를 건네면 아버지도 알아주시겠지.', 생각했는데….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깡그리 사라졌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인 거다. 그 철옹성을 절대 뚫을 수 없을 거다.
결국, 경조증과 그 말에 대한 충격이 합쳐져서, 펑 터져버렸다.
어머니는 차라리 아버지가 죽었으면 나았겠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아버지가 사라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도 미웠다. 자꾸 나를 절벽에 몰아세워서, 아버지에게 이러쿵저러쿵 생쇼를 하게끔 은근슬쩍 유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짓말 하나 없이 말했다. 어머니도 들으라고, 아버지 앞에서 큰 목소리로 뱉었다.
"오늘 우연히 걷다가 앰뷸런스를 봤는데요, 혹시 저 차가, 내가 아버지를 죽여서 그걸 수습하러 가는 차인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내가 미쳐가는 게 아버지 책임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말씀드렸어요."
"미안하다."
미안하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말 속 사유의 깊이는 현저히 얕다. 나는 물었다.
"무게가 실린 말씀인가요?"
"실렸지. 이런 환경을 만든 내 탓이지."
어쩌면 망상인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은근슬쩍 탓을 돌리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의 탓'이 아닌 '환경의 탓'으로 말이다.
"환경은 문제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너나 받으라는 말씀이 문제였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내 방에 들어갔다.
정말 기괴한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침착했다. 애써 침착한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두려움조차도.
방 문을 닫자 혼자가 되었다. 감정을 죽게 하는 약들 때문인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할까? 성의가 담긴 인사를 꾸준히 해왔다. 학비 한 번 안 보태준 것에 대해 원망의 한 마디 않고 넘겼다. 아버지의 전화 한 번에 '역시 나를 애정하시는구나!' 행복 회로를 돌렸다. 모두 내 실수였을까? 왜 하필, 그것도 내가! 또다시 생각의 늪에 잠겨야 하는거지?
그 모든 행동이 죄고, 이것은 벌인가? 아버지는 내가 던진 말에 단 1분이라도 고심을 해볼까? 이 세상에 딸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존재할 수도 있구나….
'나는 그냥 뜨거운 쾌락의 부산물, 혹은 아버지의 족쇄일지도 모르겠다.'
감히 해서는 안 될 생각도 했다.
아니, 어쩌면 다 피해망상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한 마디도 "네가 괴로웠으면 한다."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나의 모든 생각은 확대 해석이고 지나친 의미 부여인 것이다.
그렇게 결론 지으니,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어졌다. 생각이 버거웠다.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도 내가 감히 충격을 받아도 될 만한 사안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시간에, 한 마디도 정제하지 않고 그때의 대화 내용을 읊었다. 내가 들은 말이 충격을 받을만하기에 차고 넘쳤기 때문인지,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슬며시 기분 조절제가 추가되었다.
둥그렇고 하얀 약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약을 먹으면 너무 졸려서 하루 종일 자기만 한다. 사건을 곱씹을 기회조차 틀어막히는건, 의사 선생님이 내려준 '쉬어요, 괜찮아요.'하는 축복일까? 아니면, 확대 해석을 너무 하는 내게 주어진 벌일까?
당신은 알겠는가? 이 약의 의미를?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생각을 포기하고 잠만 자니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영원히… 깨지 않고 쭉 잠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