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중에도 집밥은 계속된다!

총 27 끼니 중 14 끼의 집밥 스코어가 가능했던 이유는?

by 한고운

모처럼 긴 휴가가 주어졌다. 그것도 무려 9일! 공휴일에 이어 자율휴업일까지 이어지고, 학교를 이틀만 빠지게 되면 앞뒤로 주말까지 다 합치면 장장 9일이나 되는 것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이럴 때는 무조건, 여행인 거다. 남편도 덩달아 미친척하고 휴가를 냈다. 여름휴가 미리 다녀온 셈 치면 되니까. 휴가 결제를 올리며 마음을 졸였지만 천만 다행히도 휴가는 승인되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장기 여행은 성사되었다.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자!> 다소 황당하고 파격적이게 느껴지지만 우리 집 가훈이다. 40여 년을 살아보니 이처럼 맞는 진리가 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짬짬이 최선을 다해 많이 돌아다니고, 보고, 배우고, 경험하려 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무릎도 안 아프고 돌아다닐 기운이 있을 때 실컷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늘 하곤 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고민의 여지도 없이 강릉으로 지역을 정했다. 우리 가족이 애정 하는 곳인데 가족 여행으로 10번도 더 갔던 곳이다. 하지만 길어봤자 3박 4일 일정이 전부였던 터라 뭔가 늘 아쉬웠다. 여전히 못 가본 곳이 더 많고, 또 왜 이리도 맛집은 많은 건지!


먼저 일찌감치 2달 전에 숙소부터 예약을 했다. 다행히도 에어비앤비에서 마음에 쏙 드는 숙소를 발견했다. 가격도 적정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집밥이 가능한 주방 환경이라는 점에서 100점을 주기 충분했다. 아무래도 장기 여행이라 매 끼니 밖에서 해결하기에는 금전적 부담도 되고, 또 하루에 세 번씩이나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도 귀찮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강릉에서도 집밥을 책임지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9일 X 3끼 =총 27끼, 이 중 14끼, 그러니까 절반 이상을 집밥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숙소 코 앞에 대형 마트도 있었고 평소보다 간소하게 먹긴 했지만 이건 장소만 바뀐 채 살림을 이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덤을 판 느낌이랄까.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수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여행 중 집밥 스코어를 매겨본다면?

분명 <금메달> 감 임에 틀림없다. 내 집이 아닌 다소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장 탓하지 않고 열심히 한 끼 한 끼, 마치 기록을 경신하듯이 해내고야 말았다. 설마 하면서 넉넉하게 챙겨갔던 쌀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심지어는 죽도 끓이고, 도시락도 쌌다.


그렇다면 어떤 요리들을 해 먹었는지, 재료들을 어떻게 알뜰하게 사용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과연 장장 9일 동안 주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하루에 한 끼는 그래도 반찬이고 국이고 잘 챙겨서 먹으려 했다. 굳이 일상과 다른 점이라면, 평소에는 잘 허용하지 않는 햄과 소시지 그리고 즉석국이 자주 등장하는 게 특징이랄까. 물론 계란도 자주 등장한다. 영양 측면에서도 좋고, 다양하게 곁들일 수 있으니 계란이야말로 필수 품목.


집에서 먹다 남은 야채들을 아깝다고 바리바리 챙겨간 것도 잘한 일이었다. 양배추, 양파 그리고 당근이 있어서 햄과 함께 볶아서 반찬으로 뚝딱 만들고, 소세지계란전은 한 판에 부쳐냈다. 여기에 채소를 다듬으며 남은 자투리 야채를 끌어 모아 채수를 끓여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호박, 버섯, 양파를 듬뿍 넣어주니 된장국 완성.


물론 아침부터 국 끓이기 귀찮은 날은, 시판 제품도 활용했다. 끓인 물만 부으면 되는 즉석 미역국은 참으로 편리했다. 여기에 아이들은 집에서 챙겨간 계란장을 주고, 어른들은 계란 프라이를 같이 먹었다. 평소에 요거트도 자주 먹는 편이라, 고민 끝에 요거트 메이커도 챙겨갔다. 유난 떠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 만족. 샐러드 소스로 사용하기도 하고, 견과류 듬뿍 넣어 간식으로도 먹고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았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인데 고기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강릉에서도 대형마트의 온라인 주문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삼겹살과 마늘, 야채, 무쌈 등등 필요한 재료들을 주문하니 숙소 코 앞까지 시간에 맞춰 배달되는 이 최고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저 감사한 마음 가득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실내에서는 고기 굽는 게 금지라, 호스트에게 미리 고기 불판 대여를 요청했다. 바깥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워 실내에서 먹는 방식으로 고기 파티를 즐겼다. 수고해 준 남편에게 박수를 보낸다. 고기에는 애도 어른도 어깨춤이 절로 나는가 보다. 신이 난 둘째는 아빠 곁에서 줄넘기를 하며 실시간으로 고기 굽는 상황을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완성된 아름다운 삼겹살의 자태! 플라스틱 와인잔에 담긴 사과주스는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었다. 왜 여행에 오면 삼겹살이 그토록 더 당기는지. 이렇게 우리의 삼겹살 파티는, 축제 같은 화려한 밤을 만들어 주었다.


배는 고프고, 밥시간은 훌쩍 넘어 마음이 조급했던 날도 있었다. 이럴 때는 스피드가 관건. 남은 찬밥에 자투리 햄과 김치를 송송송 썰어 볶음밥으로 재빨리 만든다. 앗, 그런데 4인이 먹기에는 턱없이 양이 부족하다. 한 번쯤은 야식으로 먹을까 싶어서 냉장고에 쟁여둔 시판 떡볶이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쪽에서는 떡볶이가 보글보글 끓고 있고 한쪽에서는 김치볶음밥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강릉 팝업스토어 '엄마표 분식집'>이었다. 역시나 떡볶이와 김치볶음밥의 조화는 성공적이었다.




이번에는 <아침밥 편>. '간소함'에 포인트를 맞춰 최대한 설거지가 덜 나오는 요리들로 했다. 전날 사온 빵이 자주 등장하는 게 특징. 요거트나 계란도 단골로 등장하는 만만한 메뉴였다.


여행지에서 아팠던 아이들, 여행지에서 죽을 쑤게 될 줄이야! 그냥 집밥만 챙기기도 바빴는데 그 와중에 부랴부랴 죽도 만드느라 여러모로 고달픈 나날이었다. 요리 난이도 하 였던 야채계란죽.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게 한정적이다 보니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여행 와서까지 죽을 만들어 주는 엄마가 어디냐며.


다음날도 첫째 아이는 죽을 먹었다. 나머지 식구들은 즉석 된장국이나 미역국에 감자채 볶음을 추가했다. 여기에 인절미는 후식으로 먹었다. 후식 배는 원래 따로 있으니까.


집밥이 힘에 부칠 때는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전 날 사둔 빵이나 떡으로 심플하게 밥상을 준비했다. 인절미나 기정떡은 우리 가족의 최애 메뉴. 여기에 음료나 계란 등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곁들이면 어쨌거나 오늘도 무사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간식 편! 장기 여행이나 보니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평소 여행보다 꽤 많았다. 평소에는 건강 때문에 밀가루를 끊고 있던 아이들 앞에서 밀가루 음식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래 여기는 여행지니까. 엄마 아빠의 일탈을 허락해주길 바라며, 숙소 근처에 유명하다고 소문난 빵집 몇 곳을 순례했다.


여행 가이드북에 나왔던, 그래서 그 맛이 너무 궁금했던 시금치 카스테라, 옛날 빵집 느낌 물씬 나는 모 시장에 유명한 빵집도 들려보고, 작지만 내공 있는 탕종 수제 식빵 집 등등. 하여간 반드시 먹어봐야 할 빵집에 대한 각종 이유와 핑계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티브이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뭔가 몰두해 있을 때 몰래 주방에서 숨어서 먹은 적이 태반이었다는 슬픈 후문.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맛 본 수박도 별미였다. 당시 제철과일이 아니었음에도, 과감하게 사 본 수박은 아이들의 환호성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이 또한 여행이니까 허락된 일탈일지도 모르겠다. 5월에 먹었던 수박은, 그 맛의 좋고 나쁨을 떠나 '수박' 자체만으로도 지금까지 두고두고 추억이 되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니, 남은 재료들 처분이 시급했다. 다시 집으로 가져가기도 망설여지고, 버리고 가자니 아깝고. 그래서 남기지 말고 식재료들을 싹 처분하고 가야겠다 싶었다. 일단 자투리 야채의 해결사는 바로 카레와 김밥이었다. 카레는 뭐 두말하면 잔소리. 있는 야채에 고기류만 하나 곁들이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물론 김치나 단무지도 있다면 금상첨화.


혹시나 해서 챙겨갔던 김밥 김은 신의 한 수였다. 일명 <영끌 김밥>은,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 메뉴의 탄생이다. 샐러드로 먹고 남은 청상추를 채 썰고, 계란도 부쳐 썰어주었다. 여기에 당근과 햄도 탈탈 털어 볶아서 준비했다. 가장 웃겼던 건 단무지 대신 무쌈이라니. 고기 파티 후 애매하게 남아서 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챙겨두었는데 킵 해 두길 어찌나 잘했는지.


일단 재료들을 쭉 모아 두고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색감은 합격. 이 재료들을 모아, 그것도 찬밥에 김발도 없는 채 맨손으로 대충 김밥을 말아줬다. 근데 결과물이 썩 괜찮아 보인다.


이건 뭐 평소에 작정하고 마트에서 재료를 빠짐없이 구비해서 만든 것보다 더 맛이 좋았다. 남편과 아이들도 최고의 김밥이랜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여행지라 마음에 여유가 넘치는 가족들이 후하게 점수를 준걸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드디어 여행이 끝나갈 때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조합의 오합지졸 밥상도 탄생했다. 구색도 엉망, 맛의 궁합도 엉망이지만 남은 음식들을 사이좋게 모두 총집합시켰다.


남은 빵, 남은 과일, 남은 죽, 남은 요거트와 견과류. 대체 종류가 몇 가지인지. 심지어는 전날 먹고 남은 짜장 소스와 찬밥까지 등장했다. 그래도 남은 음식 버리지 않고 싹 먹어서 해치우니 마음이 어찌나 편하던지.


태어나서 처음 떠난 9일간의 장기간 국내 여행, 그리고 유래 없는 여행지에서 계속된 집밥. 그 대장정의 끝은 '유부초밥'으로 마무리되었다. 여행에 와서 도시락까지 싸게 될 줄이야. 하긴 뭐 죽도 끓였는데 이쯤이야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쌀도 네 식구가 한 끼 먹을 만큼 남았기에, 짐도 줄여야겠다 싶은 마음에 유부초밥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에 들린 평창 삼양목장(목장 내에서는 밥을 사 먹을만한 곳이 없었음)에서 빛을 발해서 참 다행이었다. 유부초밥만으로 뭔가 부족할까 봐 준비한 라면은 역시나 빠지면 섭섭할 뻔했다. 과일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풀코스 식사였다.


여행 당시에는, 내내 네 식구 밥해서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과연 누구를 위한 여행인가 싶기도 했다. 그냥 돈을 좀 더 쓰더라도 편하게 사 먹을걸 그랬나 싶다가도, 코로나 시국에 외식보다는 그래도 집밥이 백배 낫다며 위로를 해보았다. 어쨌거나 가족과 함께한 그 시간이 지금까지도 찐하게 마음속에 남았기에, 참 값진 경험이 된 듯하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며 조잘조잘 이야기 나누고, 맛있다며 엄지 척을 날려준 가족들에게 고맙다.


물론 강릉의 특산 음식인 병산 감자옹심이, 사천 물회, 초당 순두부 등도 정말 별미였기에 최소 한 번씩은 해당 음식점에 방문하였다. 하지만 여행 중 뜻밖의 아이들 컨디션 난조로 부득이 쉬엄쉬엄 여행하게 되며, 초기 계획보다 훨씬 많은 횟수의 집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유명하고 줄 서서 먹는 맛집을 몇 군데나 다녀왔어도, 이상하게도 숙소에서 복작복작 거리며 만들어 먹었던 요리가 더 기억에 남는다. 물론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만든 밥상이라기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말이다. 또한 바깥에서 사 와서 먹었던 빵이나 떡도 많아 얼렁뚱땅 대충 해결한 끼니도 많았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이때의 추억이 좋았는지 지금도 종종 이야기를 꺼낸다. 강릉 숙소 테라스에서 먹었던 카레가 꿀맛이었다고, 삼각형 그릇에 먹었던 밥이 생각난다고.


또 언제쯤 이렇게 길게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아마 그때도 부지런히 밥상을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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