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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Sep 29. 2021

비 오는 날,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이 음식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조합! 감자옹심이 그리고 파전

감자 풍년이다. 엊그제 마침 감자를 사놓기도 했는데, 시댁에서 또 한가득 감자를 얻어왔다. 아무리 햇빛을 차단하고 조심한다 해도 금세 싹이 돋아나는 감자. 그래 오늘은 감자 대량 처분의 날이다! 마침 비도 보슬보슬 내리던 날,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단번에 메뉴를 정했다. 바로 <감자 옹심이>


옹심이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특히 강릉지역에서 생산되는 감자는 파삭한 식감에 하얀 분이 많아서 유독 더 맛이 좋다. 그래서 강릉 여행에 가면 반드시 잊지 않고 감자옹심이 맛집에 들려 한 그릇 뚝딱 먹고 오곤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인기와는 달리 탄생 비화가 숨어있다. 어려웠던 시절, 쌀이 귀했기에 강원도에서 경작하기 쉬운 감자와 옥수수와 같은 구황작물로 끼니를 해결했다고 한다. 비교적 손쉽게 구하기 쉬운 식재료인 감자로 밥 대신 동글동글 새알처럼 빚어서 먹었던 감자옹심이는 나름의 아픔(?)이 담겨있는 음식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관광지마다 줄 서서 먹는 물회도 알고 보면 어민들이 고된 노동 끝에 간편하고 빠르게 배 위에서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이른바 '어부들의 패스트푸드' 였다는 것.   


어쨌거나 요새는 감자도 물회도, 별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특히 감자옹심이는 영양 성분은 물론 특유의 쫀득한 맛 때문에 인기가 많다. 그러고 보면 전세 역전이 따로 없다. 그러니 인생도 이처럼 알 수 없는 것.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좌절하지 말고 역전 왕을 꿈보는 어떨지.

오늘은 너다! 싹 나오기 전에 대량 처분이 시급한 상태


옹심이의 기본은 진한 육수이다. 디포리는 물론 다시마, 그리고 야채 손질하며 남은 자투리 야채까지 탈탈 털어 팔팔 끓여준다. 육수를 내면서 동시에 이제는 감자 손질에 들어갈 차례. 감자칼로 부지런히 감자를 깎는다. 이거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리는 노동이다. 하지만 감자옹심이 맛의 희열을 기억하며, 이 정도의 시련쯤이야 이겨내야 한다!!!

감자옹심이를 위해 열심히 준비중


감자옹심이에는 재료가 비교적 단출하다. 감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양파, 당근, 호박이면 끝. 아참, 김가루와 들깻가루도 고명으로 꼭 필요하다. 일단 야채들을 채 썰어 준비해놓고, 감자는 강판에 갈거나 믹서에 갈고 채반에 밭쳐 물을 빼 준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강판에 간 것이 식감도 좋고 뭔가 오리지널 제조법이라 더 맛있긴 하나 노동의 강도가 몇 배는 된다. 두세 개쯤 갈다보면 손목은 너덜너덜해지고 현타가 심하게 온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그냥 믹서기로 가는 걸 추천. 이때 주의할 점은 물을 소량 넣어줘야 믹서기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 잊지 말자.

야채 준비 완료! 이제 공정률 50%


한 30분 정도 기다리다 보면 꽤 많은 물기가 빠져있다. 이때 물을 조심히 따라서 버리다 보면 맨 아래 새 하얀 전분가루가 곱게 깔려있다. 이 끈적끈적한 전분가루를 버리지 말고 살살 긁어모아 감자에 섞어줘야 한다. 쫀득한 맛의 비결이다. 이제 면포에 건더기들을 모아 한번 더 꽉 짜서 물기를 엎애 준다.


처음에 감자옹심이를 만들었을 때, 잘 몰라서 면보에 물기를 짜는 단계를 생략하는 바람에 너무나 질척거리는 감자를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전분가루와 밀가루를 한 바가지 퍼서 넣어서 겨우 반죽(?)을 만들었던 어이없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뿐만 아니다. 한 번은 물기 제거까지는 잘해놓고 소금 넣기를 깜박한 적도 있다. 그때 그 밍밍한 감자옹심이를 시식했던 아이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요리를 꽤나 좋아하는 편임에도 늘 처음 만드는 요리는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봐야 내공이 쌓이고 결국 열반에 오를 수 있다. (나 기독교인데 ㅋㅋㅋㅋㅋ) 그러니 요리가 손에 익으려면 같은 메뉴를 반복 또 반복이 중요할 수밖에. 어쨌거나 완벽한 감자옹심이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사소한 두 가지,


1) 물기 제거 (채반에서 한 번, 면보로 한 번 더)

2) 소금 넣기 (조금 넉넉하게 넣어야 간이 맞는다)


이제 아이들도 제법 둥글리기로 옹심이 모양을 잘 잡는다. 시키지 않아도 새알 굴리기 공정에 들어갈 쯤에는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고 후다닥 화장실로 가서 손을 깨끗이 닦고 온다. 나름 비장하게 준비태새를 갖추고 등장한 아이들에게 맡길 차례.


모양이 들쑥날쑥 일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이 음식 만들기에 참여하고, 맛있는 한 끼를 정성껏 같이 준비하는 이 시간이 참 행복하다. 뭐 '예쁜 음식 만들기 대회' 나갈 것도 아니니까. 모양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잠시 쿨한 엄마가 되어본다. (정말 심하게 못생긴 옹심이의 경우에 한해 특별 지도를 했다)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태도의 아들 녀석


이제 야채와 옹심이를 넣고 팔팔 끓여준 후 옹심이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하면 다 익은 것! 김가루와 들깻가루 송송 뿌려주면 이제 이 기나긴 과정이 끝이 난다. 드디어 감자옹심이 완성~ 진한 육수에, 쫀득한 감자의 조합은 말모! 말모!

비올 때 찰떡! 감자옹심이


자동으로 '한 그릇 더!'를 외치게 만드는 맛이다. 아이들이 먹기에는 뜨거워서 처음부터 많이 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만큼 여러 번 리필해주는 시스템이다. 본인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어 만든 음식이라 그런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식탁에서 꽤나 의기양양하다. 그래, 늬들 지분이 있는 음식 맞다. 고맙게 잘 먹을게.  

옹심이 단독샷 나갑니다~ 보기만해도 쫀득해지는 기분


옹심이의 맛은 기가 막히지만 아무래도 이것만 먹기에는 조금 섭섭하다. 그래서 옹심이의 단짝 친구, 파전도 같이 준비했다. 마침 냉장고에 쪽파 남은 것도 있고, 냉동실에 새우와 오징어도 넉넉히 있길래 이건 뭐 안 먹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 집은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주로 먹기에, 현미가루에 전분가루 한 스푼, 다진마늘 반 스푼, 소금, 후추를 넣어주면 시판 부침가루 부럽지 않다. 프라이팬 묘기로 앞 뒤 뒤집어가며 골고루 익힌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래뵈도 내가 주부 경력이 10년이 훌쩍 넘거든? 프라이팬 뒤집기 신공 쯤은 기본이지. 아무튼 접시에 예쁘게 담아주면 이제 드디어 먹는 일만 남았다. 

감자옹심이에 파전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죠!


치사하게 새우와 오징어만 쏙쏙 골라서 먹는 둘째가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이놈, 딱 걸렸다! 나도 새우랑 오징어 좋아하거든? 골고루 먹으라는 경고와 동시에 강한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준다.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데 네 식구 경쟁적으로 흡입한다. 치열한 젓가락 공방이 파전 접시 위에서 벌어진다. 도 질세라 다 엎어지기 전에 열심히 먹는다. 이렇게 전투적으로 맛있게 잘 먹어주는 가족들이 있기에 늘 고맙고 오늘도 요리할 힘을 얻는가보다.


비 올 때 생각나는 음식은 다양하다. 수제비, 짬뽕, 라면 등등. 하지만 집에서 구하기 쉬운 만만한 재료인 데다가 이왕이면 건강에도 좋은 감자로 오늘 옹심이 한 그릇 만들어 먹는 건 어떨까? 재료를 손질하고 갈고 물기도 빼고 모양도 만들어야 하는 등 시간이 꽤 걸려 번거롭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런 과정이 있기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슬로우푸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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