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에게 "단명하겠다"고 점지한 스님
초딩, 아니 국딩 6학년 때
집에서 친구들하고 TV를 보는데
스님이 공양을 받으러 왔다
엄마가 쌀과 음식을 싸주셨고
스님은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방 안에 앉아있는 꼬맹이 셋의 얼굴을 뜯어본 후
저 놈은 나랏밥을 먹겠다
저 놈은 장사를 해야겠다
저 놈은 단명이네
라고 툭툭 뱉었다
단명의 주인공은 나였다
엄마는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스님은 "이름을 많이 내야한다"
"공양은 잘 먹겠습니다" 라고 쏘쿨하게 던지고는 나갔다
엄마는 "별 미친 땡중을 다보겠네"라고 뱉곤 소금을 뿌렸다
하지만 엄마는 땡중처럼 쏘쿨하지 못했다
이듬해 새로 낸 가게 이름은 내 이름 두 자가 박힌 '00식당'이었다
ㅡ,.ㅡ
사춘기를 맞은 난 중학생때까지 우리집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나도 땡중의 예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름 이름을 낼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사시 패스, 국회의원 출마 외에는 생각나지 않아
"일찍 '잘' 죽자"가 16살의 인생 모토가 되었다
고딩 1학년 때 학교에서 공모전이 있었다
공부가 싫어 책에 파묻혀 살았기에 공모전에 응모하는 건
서울로 대학갈 것을 당연시하고 도시로 유학보낸
부모님 희생에 대한 면죄부였다
'떠오르는 아침해가 붉은 혀를 현관까지 내밀었다'라는 어느 소설의 구절에 영감을 받아
유치찬란해서 퇴고 후 본 적이 없는 단편소설을 썼다
그따위 소설은 시커먼 남학생들만 있는 학교였기에 입선이 됐고 교지에 실렸다
난 입선 사실을 몰랐었는데
다른 반 친구가 점심시간에 교지를 들고와
시커먼 얼굴은 벌게져서
하얀 눈은 빨개져서 내 앞에 나타나더니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더라"고 고백했다
이때 깨달았다. "유명해지려면 구라를 연마하자!"
TV에 이름이 나가면 유명해질 것 같아 PD가 되고자 대학에 들어갔지만 실패
감독이 못 되면 작가가 되자는 마음으로 도전했지만 또 실패
그렇게 26살에 "일찍 '잘' 죽자"란 모토를 다시 받아들였다
어린,
아니 젊은,
아니 늙지 않은,
아니 낡지 않은?
ㅠㅠ
여튼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난 살아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단명이 환갑이란 말도 있다
아직 한 갑자 이상 남았다
사고가 아닌 이상 병이나 자연사로 단명할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아픈 데도 없고 만병의 원인이라는 비만도 아니다
또... 이래저래 이름 알려지는 경험이 이어진다
블로그를 할 때는 한 달에 30만명 넘게 온 적도 있고
아이들 동영상을 백업하려고 편집 없이 생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도 구독자가 1만명이다
이름을 내기 위해서 발악할 때는 되지 않더니 흘러가는 대로 살다보니 기회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