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아들을 타향살이 보냈으면서도 농사일이 바빠 연락도 없던 엄마에게서 삐삐가 왔다
"교도소에서 편지가 왔어야? 뭔일이다냐?"
음성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집에 전화했다
"이게 뭐래? 왜 교도소에서 니한테 편지가 오냐?"
-나도 몰라. 누가 보낸 거야?
"조ㄱㅅ라는데?"
-조ㄱㅅ? 처음 듣는 이름인데?
"흉하게 이게 뭔일이여
-어디서 온 거야?
"청송교도소래."
남녘 산골에서 자란 나는 그때까지 청송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도로 보니 경북 내륙에 있었다
대구도 안 가본 내게 청송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푸른(청) 소나무(송) 마을이라... 마을이름이 아름다워 더 무서웠다
소나무숲에 쌓인 교도소의 푸른 적막을 상상하니 닭살이 돋았다
더 알아보니 청송교도소는 조폭이나 흉악범이 주로 가는 유명한 교도소였다
엄마에게 내용을 보라고 했는데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불에 태워버리겠다고 하셨다
내가 보겠다고 별일은 없을테니 걱정 마시라고 하고 수화기를 내렸다
수화기를 고정하고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가는 본가였기에 전화 이후 3주만에 갔다
그 이후로도 편지가 내리 3통이 왔다
편지는 풋내 나는 글씨가 깜지처럼 가득차있었다
매번 3~5장의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겁을 먹고 열어본 편지는 읽을 수록 호기심이 커졌고
4통을 다 읽었을 땐 묘한 스릴을 즐길 수 있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월간지 <로드쇼>를 챙겨봤다
언젠가 어느 영화를 보고 독자리뷰 코너에 투고를 했다
지금은 영화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데
내 리뷰는 운좋게 명함만한 크기의 지면에 실렸다
내 리뷰를 정성껏 가위로 오렸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 리뷰 크기에 비해 잡지는 훨씬 컸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는 얉은 감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리뷰를 보고 그사람이 편지를 해왔다
'최신가요' 책의 펜팔페이지를 보고 편지하던 세대이지만
'로드쇼'를 통해 펜팔을 할줄은 몰랐다
더구나 6살 많은, 같은 남자, 범죄자에게서 편지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영화로 시작해 교도소 생활을 소개한 후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24살에 안양에서 조폭으로 생활하다 폭력 혐의로 6년 형을 받았다
칼로 상대파벌의 조직원을 찔렀다는 혐의인데
사실은 자기가 아니라 선배가 찔렀고 그 선배는 재범이라 형이 높을 수밖에 없어
초범인 자신이 조직을 위해 대신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직생활도, 상대를 해한 것도 후회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후회와 반성이 과거들이 반성문처럼 가득했다
여기까지는 당시에도 흔했던 조폭영화의 시퀀스였기 때문에
답장할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또 교도소에 편지를 보내면 내게 불이익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답장 없이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한 달 후 집에 오니 또 몇 통의 편지가 쌓여있었다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심심해서 계속 한다고 했다
안에서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한데 누군가에게 편지할 '일'이 생긴 것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장 시작마다 꼬박꼬박 '명징씨'라고 붙였다
아마도 그는 여성스러운 내 이름을 보고 나를 여자로 생각하는 게 확실했다
그 오해가 메스꺼워 답장을 한 것도 있다
이번 편지들에는 미래에 대한 얘기들이 많았다
나가서는 조직생활을 안 하고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20살인 여동생을 위해서,
새벽밥을 혼자 해먹고 공장 다니는 여동생을 위해,
부모님 없이 자란 여동생을 위해
기어코 바르고 평범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들이 기특해 답장을 써줬다. 이때까지도 자의로 답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조ㄱㅅ님. 명징입니다
그간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답장을 못했습니다.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생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내용들이 낯섭니다. 제가 도움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남 얘기 들어주는 건 잘합니다만 저는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서 달에 한 번 집에 오니 서로 편지가 엇갈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입니다. 기대와 다를 것 같아 말씀 드립니다."
대강 이런 내용으로 답장했다.
다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담은 편지가 한 통 더 오고
내 답장을 받고 쓴 편지가 왔다
남자 고등학생이었을 줄은 몰랐다고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고 답장 자체가 반갑고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동생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가 오지만 그마저 최근들어 뜸해지고 있어 더 반갑다고 했다.
조직원들에게는 편지가 오지 않고 자신도 이제 연락 안 한다면 내 편지가 마치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도 되는양 반가워했다.
그후의 편지들에는 더 자세한 과거와 더 탄탄한 다짐을 남겼다
서너 통의 답장을 했던가? 그러다 고3을 맞이했다
고3이 되고서 나는 그에게 더 편지 못한다고 연락했다
수능 준비로 집에도 몇 달 안 올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나의 특이했던 펜팔친구로, 그 해 다이어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수준으로 기록됐었다
대학교 1학년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내게 PCS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삐삐에 음성이 와서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조ㄱㅅ입니다. 편지를 드렸었어요. 기억하실지... 저 가석방 돼서 한 달 전에 나왔습니다. 지금 안양입니다. 공장이지만 직장도 구했습니다. 시간 될 때 통화하고 싶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바로 전화를 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서울 1년차였던 내게 세상은 짙은 푸른색처럼 살벌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또 경기도 전화번호가 문자에 찍혔다
그날은 술을 한 잔 걸쳤던 터라 공중전화에 가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2년 전 편지처럼 그가 주로 말했고 나의 답은 굼떴다
-나온 지 한 달 됐는데 일하느라 바빠 이제 연락했습니다
-여동생하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공장일인데 안에서 해봤던 일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조직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안 할 겁니다
-기회가 되면 술 한 잔 사고 싶습니다
-또 연락해도 될까요?
내 답은 평범했다
-잘 됐네요
-네 기회되면 봬요
-네 또 연락하세요
-건강하세요
또 통화하지는 않았다
음성과 문자는 또 왔지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해를 넘기고 PCS로 바꾸면서 엄마에게 이제 그에게 번호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전했다
그에 대해서는 몇 년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가
제대 후 같이 살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얘기했었다
"그 정도면 한 번 볼만 하지 않냐? 설마 뭔 일 생기겠어?"
친구의 물음에 소주잔을 들었다
"딱히 뭐라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내가 비겁했던 거 같아."
그렇게만 말하고 술을 넘겼다
이제 중년이 됐을 조ㄱㅅ님은 바람대로
세상의 비겁함에 타협하지 않았을까?
평범하게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부모가 됐을까?
어딘가에 있을 그를 응원한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