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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09. 2024

[E] '나는 왜 사나......' 했었다

'나는 왜 사나......' 했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희망이 됐다


오늘도 어제처럼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관에서 시끄럽게 물건을 팔고 있었지만

내가 사야할 것도, 산다고 쓸 일도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그저 눈이 떠져 일어난 것처럼

눈을 뜨고 있으니 볼 것이 필요해 TV를 켰을 뿐이었다

내 발등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햇볕이 점점 멀어진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내 나이 86살. 1초도 아까운 이 나이에 시간이 손가락 사이를 무심히 빠져나간다


목이 잠긴다

억센 손이 건조한 집안 공기를 뭉쳐 내 목구멍에 쑤셔넣는 것 같았다

말을 안 하니 목이 케케묵고 있다

모든 것이 내 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 끝에는 '나는 왜 사나?'는 물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집을 나섰다

살아있다는 각성이 필요했다 

바닥을 뒹구는 낙엽을 발로 짓이겼더니 바스락거리며 사라졌다

'저 낙엽도 온몸으로 소리내며 존재를 잃는데 나는 말도 못하고 사네'

헛헛함으로 가득한 내 가슴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깔깔깔"

소리가 청아해 머리 윗부분을 울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버스정류장에 앉은 두 명의 소녀들이 뭔가를 보고 웃었다

큰 스마트폰이었는데 그 안에는 어리바리하게 생긴 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뒤에서 가만 지켜보니 스마트폰에 친구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다

얇은 펜으로 액정을 휘휘 저으니 선이 그려졌고 펜을 물감에 찍어 액정에 대니 색이 입혀졌다

나는 동네 주민센터에서 컴퓨터를 배운 지 7년째였는데 저건 못 봤던 기술이었다

마른침을 다시 삼켰다

목이 축축해 맑은 소리가 날 때까지 또 침을 삼켰다

"저기, 학생. 그게 뭐야?"


학생들이 '아이패드'라고 알려줬다.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메이커가 무엇인지 어디서 사야하는지 물었다

건너편 마트 7층에 가면 살 수 있다고 알려줘 곧장 길을 건넜다

7층은 가전제품을 파는 층이었다

지난 겨울에 쇼파에 까는 작은 전기장판을 사러 와봤던 곳이다

물어물어 애플 매장에 갔더니 기계가 너무 많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원에게 이런 걸 사러 왔다고 하니

"딸이랑 같이 오세요, 할머니."라는 날선 말이 돌아왔다

'나는 내 물건 사러 온 건데 딸이 왜 필요한지...'

내가 살 물건이 아니라는 것 같아 서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까 학생들이 들고 있던 제품을 떠올리며 찾아냈다

패드를 들고 옆에 있던 펜슬도 챙겼다

계산하러 갔더니 직원이 다시 한 번 사려는 게 이게 맞냐고 물었다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 펜슬."

내가 산 '그림 그리는 기계'의 이름이었다

110만원이 넘었다. 석 달치 생활비가 싹둑 잘려나갔다

삼성처럼 깎아주지도 않고 충전기 같은 사은품 하나 주지 않았다

뭐 이런 박한 매장이 있냐고 속에서 아우성이었지만

나도 학생들처럼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웃고 나왔다


내가 패드까지 사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한 데에는 컴퓨터 선생님의 응원이 컸다

그 선생님은 처음에 내가 학원에 갔을 때 컴퓨터 켤줄도 모르니까

"할머니 컴퓨터 안 배우시면 안 돼요?"라고 면박줬던 박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빠지지 않고 집에서 복습도 하면서 진도를 따라오자 선생님은 나를 아주 예뻐하셨다

PPT 수업을 들을 때 내가 곧잘 도형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재미 삼아 연습장에 그림을 그린 것을 보고 그림을 배워보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걸 좋아했다

배우면 기분이 좋았는데 여자가 배우는 걸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여자는 학교 대신 시집 가는 게 우선인 때였고 배움이 길면 팔자가 사납다는 말을 듣던 때였다

그래도 배움을 놓기 싫어 부모님 몰래 익산여고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합격증을 받고 세상 다 가진 듯 기분이 좋았지만 범처럼 무서운 아버지에게 얘길 꺼낼 걸 생각하니 겁이 나서 좋아할 수 없었다

며칠을 혼자 애태우다가 아버지가 잡일하러 군산으로 떠나기 전날을 기회로 잡았다

화롯대에 모여앉아 군고구마에 동치미로 아린 속을 달래던 밤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상의 없이 시험을 봤냐고 묻고는 담배를 물었다

눈치 보던 엄마가 등짝을 때리면서 타박을 늘어놓았다

겨우내 돌처럼 얼었던 논이 녹아들 때

아버지는 보리 서른 가마니를 팔아 등록금을 내주셨다


이후에도 배울 기회가 있다면 다 배웠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배우는 게 더 재밌었다

집을 짓고 싶어서 공사 현장 사람들을 붙잡고 

집 짓는 법, 건설 허가 받는 법, 건축 계약하는 법, 집 분양하고 세 놓는 법 등등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다

그렇게 배움을 쌓았더니 분양 사업을 해 일곱 자식을 건사할 수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져 집이 안 팔릴 때는 미싱을 배웠다

미싱만 해서는 돈이 안 됐는데 미싱 기계를 고치러 온 수리공을 붙잡고 돈 될 일을 물어봤더니 "돈을 벌려면 사장이 돼야죠"했다. 그렇게 자수 공장 세우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서 기사 열 명을 둔 공장을 운영하게 됐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이어 아이패드를 손에 쥐었다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주는 학원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못 배울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컴퓨터도 할 줄 알고 스마트폰도 다룰 줄 알았다

유튜버, 구글이 내 선생님이었다

유튜버에 수 백 선생님이 계셨으나 내 몸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선생님들 말도 빠르고 어플의 기능을 잘 모르니 내가 못 따라갔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유튜브를 닫고 패드만 봤다

펜으로 하나하나 눌러보면서 직접 그리면서 익혔다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하고 잘못 됐으면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배우는 속도는 더뎠지만 그 시간이 아깝지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라고 생각했다

쇼파에 앉아 햇볕에 내 발등에서 TV로 옮겨갈 때까지 꼼짝 않고 그림만 그렸다

아슬아슬 선을 이어가다 보니 그 긴장감에 자꾸 침을 꼴깍 삼키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목도 잠기지 않았다

말을 해야 풀리던 목이 말을 안 해도 잠기지 않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나와 말을 해가고 있었다

'재순아 너는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였어'

'너는 꽃을 좋아하니까 꽃을 놓고 그려봐'

'꽃처럼 예뻤던 옛날 일들도 떠올려봐'

그림이 쌓여갔다

잘 그리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이 쌓이니 건강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패드 그림은 벽에 붙여둘 수 없으니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인별그램에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나도 인별그램에 내 집을 마련했다

집을 등록할 때 성(姓)을 적는 란에 나의 성(性)인 ‘여(女)’를 적고, 이름난에 ‘유재순’을 넣는 실수를 했다

그래서 내 인별그램 이름은 '여유재순'이다






생기를 머금고 아침마다 새롭게 피어오르는 꽃을 자주 그리게 된다

내 그림을 본 손님들이 "더 잘 살고 싶은 희망을 얻었다"고 인사한다

거기에 "고마워요"라고 댓글을 달면 더 힘이 생긴다

그렇게 오늘까지 1,61개의 그림을 세상에 보냈다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 '여유재순'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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