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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09. 2024

#27 정숙한 여자, 너의 이름은 불행히도 '안정숙'

곧고(정) 맑게(숙) 살라고 조선의 마지막 유림이었던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지만

할아버지가 치매였을까... 자신의 성이 안 씨라는 걸 잊었나보다

너의 이름은 '안정숙'이다


교실에 콩나물시루처럼 아이들이 빼곡했는데도 네 이름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교실을 가도 칠판 옆에는 '정숙'이라고 써있었고

아이들은 너를 보면

입술을 모으고

검지를 세워서

입술에 댄 채

눈은 엄숙하게

"정숙"

1초 근엄함을 유지한 표정은 0.1초만에 개구진 표정으로 바뀐 후 목통을 긁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는 고사리손으로 한자까지 열심히 그려 친구들에게 뜻이 다르다 항변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뜻은 중요하지 않았다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이름 놀림은 고학년이 되자 줄어들었다

날마다 새 말을 습득하는 아이들에게 정숙보다 더 좋은 놀림이 샘처럼 솟았다

순자는 순대

광자는 미친년

미숙은 미숫가루

유치하고 한심했지만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배꼽 빠지는 네이밍이었다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건 더 큰 시련을 맞기 위한 신의 괴팍한 설계였다

사춘기를 맞은 남자 애들이 여자들 뒤로 다가가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겼다 놓으며 놀 때다

부끄러워 하며 가슴을 감싸고 주저 앉거나

도끼눈을 뜨고 달려들어 범인의 사타구니를 냅다 갈기거나

재미보다 더 중요했던 그 장난의 동기는 여학생들의 성징이었다

'알 거 다 알게 된' 사내들에게 '정숙'이란 이름이 다시금 입방아에 올랐다

"너는 왜 안정숙이냐? 정숙하지 못하냐?"

이런 놀림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학교 담벼락과 미끄럼틀 뒷판에 네 이름이 새겨졌다

"@@이와 안정숙이 밤이면 대나무밭으로 들어간다"

"정숙이가 제일 잘 하더라"

"안정숙의 가슴은 체육 장난감이다"

무엇하나 사실이 아니었지만 유희에 있어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상상력이 발휘됐고 얼마나 아랫도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는지가 평점을 좌우했다

불행히도 너의 가슴은 정숙하지 못하고 꽤 커져 있었다


일찍이 놀림에 익숙해 어떠한 장난에도 무던했던 너는 이번엔 조금 속상했다

@@이나 체육이나 모두가 싫어하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이 이상하지 사람 자체는 괜찮지 않나?'하는 자평에 금이 간 것 같았다

어느 하교길에 너는 갑자기 대나무밭이 궁금해졌다

학교 뒤에 있는 대밭에 갔다

하늬바람이 네 귓등을 훑고 대나무숲으로 사라졌다

숲은 깊고 검었다

습한 이끼 냄새가 올라왔다

무섭지 않았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발 아래 돌을 집어들어 흑막 속으로 냅다 던지고 돌아섰다


네가 여고를 진학한 건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여고라고 이름 놀림을 피할 순 없었다

그 놀림은 또래가 아닌 위계에 의한 폭력으로 다가와 더 위협적이었다

윤리를 가르치는 윤리는 성리학을 꺼내들어 조선 여인의 정숙에 대해 설파한 후 궁녀들의 동성애를 더 공들여 소개했다

꼿꼿해 보였던 문학은 '레디 메이드 인생'을 가르치다가 난봉질하는 지식인에 혀를 차면서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힐난했다

단지 수업을 열심히 듣고자 고개를 들었던 너는 윤리와 문학의 음산한 눈빛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과학이든 수학이든 가정이든 누가 수업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학은 네게 탈출구였다

'정숙'이란 이름의 터였던 고향에서

'정숙'의 다양한 이야기가 도는 사람들로부터 너는 떠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좀 더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너는 브라운관 속에서나 봐왔던 과 '신방과'를 선택했다

남녀가 반반 있었고 남녀 누구나 곧 브라운관으로 뛰어들 것 같은 세련미가 있어 보였다

대학에서는 네 이름에 주목하는 촌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Y2K의 혼돈을 두고 MTV는 더 화려해졌고 너희들도 들떠있었다

수업 끝나고는 술집에서, 공강에는 학교 잔디밭에서 술로 세기말을 즐겼다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대비를 더 단단히 해야하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됐지만

어떻게 될 지 모르니 현재를 즐기자고 노래했고 '까르페 디엠'을 외치며 선동했다

외국에서 온 그 말은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몰랐지만 갓 알코올을 입에 댄 너에게는 달콤할 뿐이었다


성인으로서의 해방감과 세기말 인간으로서의 혼돈은 알코올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막강한 에너지를 냈고

그 에너지는 MT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해가 기울 때부터 마신 술로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을 때

한 선배가 봉인을 해제했다

'지성인에게는 너무도 유치한' 정숙을 입에 올렸다

"정숙아, 넌 정숙하니?"

눈가가 살짝 기울었고 입꼬리는 30도 정도 올라간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말을 선배 말이라면 휴전선도 넘을 기세였던 동기 놈이 받았다

"오~ 그거 꽤 철학적인 질문인데요? 누구나 어떤 희망과 기대로 이름을 짓잖아요? 그렇게 살기 바라고?"

'박성기'란 이름이 할 말은 아니었다

이어 선배를 좋아하는 동기 년이 분위기를 몰아갔다

"우리 진실게임 할까요?"

내게서 화살이 걷어지는가 싶더니 나침반 바늘이 북극을 찾듯 결국은 내게 짓궂은 질문이 이어졌다

"첫키스가 언제야?"

"못해봤어? 진짜 정숙하네?"

"얘~ 안정숙이잖아! 키스 건너 뛴 거 아냐"

까르르 까르르 

가늘고 요염한 웃음이 이어지더니 질문은 최초 봉인을 해제한 선배에게 돌아갔다

"첫키스는 언제예요?"

"오빠는 A 언니와 언제 키스했어요?"

"A 언니와는 어디까지 갔어요?"

관심 없는 질문이 이어져 너는 밖으로 나갔다


사위가 어두웠지만 강에 비친 달을 따라 걸었다

달의 흔들림이 적은 지점을 찾아 바위에 걸터 앉았다

물가임에도 도시보다 건조한 밤공기를 폐로 받아들이며 숨을 골랐다

'첨벙'

돌팔매가 달도 네 고요도 깼다

그 놈, 아니 그 선배였다

술기운일까, CC였던 A가 없어서였을까 그는 대담했다

놀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니

네게 관심이 있어서 그랬다며 고백했다

널 더 알고싶다고 더 친해지고 싶다는 그의 말에 너는 입술을 내줬다

대담했던 그는 이후에도 A와 공개연애를 하면서 뒤로는 너를 만났다

곧 A와 헤어지고 캠퍼스에서 당당히 네 손을 잡고 걷겠다는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군대를 갔다

군대에 가서도 A를 면회로 불렀고 네게는 편지를 썼다

너는 그때서야 정신적인 정숙이 육체적 정숙보다 중요함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도덕, 교양, 이치, 선, 매너 등으로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후로 정숙하게 대학생활을 한 너는 졸업과 동시에 방송작가로 취업했다

나름 전공을 살렸다지만 네가 실제 하는 일은 시장바닥 장사와 다를 바 없었다

흥정하고 싸우고 이기고 패하고 도망치는 정글이 따로 없었다

선배 작가에게 야비한 갑질을 당하고

피디들에게는 서러운 꾸지람을 듣고

방송인들에게는 더러운 손짓도 당해야 했다

누구나 "우린 동업자"라며 막내까지 챙겨들려 했지만

돌아서면 먹이를 찾아 막내든 퇴물이든 가리지 않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현실, 실전, 적응, 독고다이 등으로 애써 포장했다


피디가 룸으로 불러 술을 따르게 할 때

잉꼬부부로 컨셉 잡은 유부남이 을왕리로 조개구이 먹으러 가자할 때

팬임을 밝히자 눈빛이 선해지며 "작가님 고마워요~" 앵앵거리더니 며칠 후 집으로 불러 반나체를 하고선 탁한 눈으로 앙앙거릴 때

진지하게 너는 개명을 고민했다

너는 그런 놈들을 향해 병신, 고자, 씨퐐놈, 부랄을 깔 놈 등등 가급적 신체 부위를 망가 뜨리는 욕설을 골라 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했다

연애란 것은 네게 불가사의한 일이였지만 너는 해냈고

생애 첫 연애에 일사천리로 진도를 뺐다

모든 게 바삐 돌아가는 네 일상이기에 더디 갈 이유가 없었다

가진 것 없던 너였기에 상대에 크게 바라지도 않았기에 결혼식은 간소하게 치렀다

결혼 후에도 바쁘게 일했기 때문에 실제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퇴근 후에 집에 가면 남편이 둔탁한 손으로 단출한 찌개 하나 따끈한 밥 하나 차려놓았으므로 너는 행복했다

출근과 퇴근, 세상의 요일과는 다른 스케줄을 살았기에 신혼의 재미를 즐기기에 환경은 열악했지만

남편에 따뜻한 품, 때론 격렬한 관계 후 환희... 낯설었지만 좋았던 그 감정들을 너는 의심하지 않고 누리기로 했다

해가 지나도 일은 한가해지지 않았지만 신혼의 알콩달콩한 교감은 한가해졌다

3년이 지나자 결혼기념일을 까먹기 시작했고

5년이 지나자 겨우 얻은 함께 있는 시간에 서로의 얼굴보다 폰을 더 들여다봤다


예정된 지방촬영이 비로 취소가 되자 너는 빨리 눕고 싶은 마음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니 그 시간에 회사에 있어야 할 남편의 차가 있었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남편 차의 본넷에 열기가 남아있어 전화할 마음을 접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23층을 누르고 하차할 때까지 너는 기도했다

'제발 아니어라. 뭐든 아니어야 한다. 남편이 직장에서 일할 화요일 오후의 일상이 변경돼서는 안 된다.'

현관문을 열고 중문을 열고 거실과 안방, 욕실 등을 순식간에 파악하기 위해 너는 사소한 행동을 삼갔다

꽤 심플했고 일사분란했으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20초였다

너는 아니길 바랐던 것을 확인했고 

안정숙의 집이 안정숙 외의 두 사람으로 정숙하지 못한 집이었음을 확인했다



집을 정리하고 결혼생활을 정리한 후 긴 휴가를 냈다

먼 나라로 여행을 했고 오랜 친구를 만나 많이 울었다

긴 시간 동안 혼자 생각했고 긴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고향에 도착했다

집이 불편할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편했다

오히려 부모님이 네 눈치를 보며 불편해 해 죄스러웠다

봄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 쬘 때 집을 나서 걸었다

걷다 보니 학교에 다다랐고 휴일이라 빈 학교를 거닐었다

운동장 벤치에도 앉아보고 창문 너머로 교실 안도 봤다

복도 창을 따라 걸어보고 체육이 살던 관사도 들여봤다

건물을 다 도니 대나무밭이 나왔다

근 20여년 만에 대나무숲과 마주했다

여전히 깊고 검은 대나무숲이었지만 그때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돌을 들어 던졌다. 검은 숲이 삼겼다. 그리곤 작은 소리 하나 내놨다

오랜만에 너는 다시 네 이름을 생각했다

안정숙.

'내 이름을 놀리던 사람들은 내게서 무엇을 봤을까?'

'왜 굳이 나를 안 정숙한 여자라 놀리면서 즐거워 했을까?'

'내 이름을 부르면 정숙하지 못한 자신이 찔려서 겁이 났나?'

다시 돌을 들었다. 몸을 크게 뒤로 젖히고 힘껏 던졌다

의욕적으로 던진 돌이 바로 앞 대나무에 튕겨져 내게 굴러왔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할아버지 산소에 들러 인사한대로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곧고 맑게 살지 않은 적 없다. 곧지 못하고 맑지 못한 놈들이 붙어 먹었을 뿐이다.'

안정숙은 개명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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