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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19. 2024

#28 [망측 로맨스1] 키스 먼저 할까요?

오전 11시, 

숲뷰 카페의 테라스 벤치. 

처음 만나는 시간과 장소치고는 범상치 않았다 

물론 수혁과 상미의 만남이 평범하지는 않다 

 

'초추의 양광', 11시의 햇살이라도 9월 초가을의 햇살은 풍족하다 

수혁은 벤치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았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온다 

상미는 벤치에 닿았으나 인사를 해야할지 앉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기척을 분명 느꼈을 건데 수혁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있었다 

'가오 잡나?' 

상미는 느끼한 폼생폼사 사내에 질색한다 

 

상미 : (선 채) 저기... 

수혁 : (눈 감은 채) 앉으세요 


'봉사인가?' 상미가 기겁할 찰나 수혁이 

눈을 뜨고 살며시 웃으며 일어선다 


수혁 : 반가워요, 앉으세요 

상미 : 네, 반가워요. 결국... 이렇게 만나네요 

수혁 : 제 말이 맞죠? 우린 만난다고 했잖아요 ㅎ 


수혁이 상미를 지긋이 바라본다 

상미는 그 눈이 부담스럽다. 얼굴을 앞으로 향해 가을 볕에 한숨을 던진다 


상미 : ㅎ 막상 만나니 창피하고 민망하네요 

수혁 : 굳이 공간을 의식하지 마요. 우린 어제까지 세상 편한 친구였잖아요 

상미 : 그렇게 말하니 더 창피해요 ㅎ 비행청소년 같아 ㅋ 

수혁 : ㅋ 청소년이라니 나쁘지 않네. 자식이 청소년인 아재, 아줌인데 ㅋㅋㅋ 

상미 : 애도 큰데 이러니 더 망측스러워요 

수혁 : 연애하는 데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마음이 중요하지 

상미 : 우리 만남이 망측스러운 데에는 이유가 세 가지나 돼요 

        첫째, 풋풋하기에는 늙었다 

        둘째, 온라인에서 만났다 

        셋째,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이다 

수혁 : 셋 다 팩트지만 하나도 공감 안 돼요! 

       우린 늙었지만 풋풋해요~ 특히 당신은 주름 하나 없네요 

       온라인에서 만난 게 뭐? 요새는 교육도 회의도 온라인으로 하는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잖아요, 다가올 성공을 위해 우리가 실패를 했었나보죠 

상미 : (사기꾼인가? 혀가 길다)  성공은 무슨... 그리고 나 주름 많아요 


수혁의 눈이 또 지긋해진다. 상미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상미 : 좀 쳐다보지 좀 마요! 민망해 죽겠네 

수혁 : 그럼 눈 감을까요? 

상미 : 차라리 그래요 

수혁 : (눈 감고) 눈 감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키스 먼저 할까요? 

상미 : (수혁을 보고, '개변태인가?' )

수혁 : (눈 뜨고) 키스할 때 눈 감고 해요, 뜨고 해요? 

상미 : 그게 왜 지금 궁금해요? 

수혁 : 눈 감고 할 수 있는 걸 생각해야 하니까요 

상미 : 훗. 뜨고 해요. 이 놈 잘하나 못하나 봐야하니까 

수혁 : 그럼 키스도 못하겠네 

상미 : 장난 좀 치지 마요! 

수혁이 두 손으로 상미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마주친다 

수혁 : 움직이지 마요. 내 눈 봐요. 검은 눈동자를 봐바. 안 흔들리죠? 나는 상미씨에게 진심이예요. 흔들리지 않아 


상미는 순간 심쿵했지만 티내고 싶지 않았다. 연애 초반엔 기싸움이 중요하다 


상미 : 놔요, 비싼 파데 발랐는데 뭉개져요 


수혁은 손을 놓고 웃는다. 상미는 얼굴을 앞으로 향하고 한숨 쉰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상미 : 오면서도 몇 번을 마음이 바뀌었어요. 갈까 말까, 돌아갈까 그냥 갈까 

       나 정말 유교걸인데 겁대가리도 없이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을 보는 거잖아요 ㅎ 내 친구들이 알면 기겁할 거야.  근데 약속을 지키려 왔다기 보다는 정말 수혁씨가 궁금해서 결국 왔어요 

수혁 : 후회하나요? 

상미 : 아뇨, 일단 선택하면 후회는 안 하는 주의예요. 그냥... 아직도 어리둥절해서요 ㅎ 

수혁 :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뭐지? 하다가 아! 사랑이구나~ 하는 거죠 

상미 : 사랑? ㅋ 너무 김칫국이라 촌스럽기까지 해요. 사랑이 뭐야! 난 그거 버렸어 

수혁 : 한 번 실패했다고 다신 안 하게? 

상미 : 기대는 존재가 있어야 하잖아요. 난 사랑은 없다고 봐 

수혁 : 현타를 쎄게 맞았구나? 

상미 : ㅎ 어쩜 진실을 알게 된 거지 

수혁 : 남은 생 어찌 살려고 사랑을 포기해요 

상미 : 애들 키우는 맛에 살죠. 아, 애들하고는 사랑하지 ㅎ 그게 진실하고 참된 사랑이지 

수혁 : 애들 사춘기 전이잖아 ㅋ 장담하지 마요 

상미 : ㅠㅠ 슬프다... 사춘기라고 방문 닫고 살 애들 상상하면.... 

수혁 : 그러니 이제 본인 사랑도 있어야 한다구 

상미 : 난 그딴 거에 관심 없어요 

수혁 : (다시 지긋이 본다) 관심 있어 나온 거잖아요 

상미 : (소름!, '미친놈인가?') 나, 커피 사주러 나온 거거든요! 


상미와 수혁은 맘카페에서 알게 됐다. 상미가 초등 아들이 키가 작아 성장에 대한 고민글을 썼는데 수혁이 독일 분유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행상인가?' 의심 했지만 직구 방법까지 알려주는 친절함에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후에도 댓글창 곳곳에서 그를 봤고, 육퇴 후 적적함을 토로한 글에 그가 남긴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글에 채팅까지 트게 됐다. 그렇게 이들은 만나게 됐다. 


<네가 없이 웃을 수 있을까? >

수혁과 일상을 공유한 지 한 달쯤 지나자 상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상미는 투쟁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고집과 싸워야 했고, 돈과 싸워야 했고, 이혼녀를 바라보는 시선과 악에 바쳐 싸워야 했다. 싸움의 기술에서 웃음은 승기를 잡은 후에나 탑재하는 것이었다. 2년차 돌싱 상미는 한창 이를 갈 때였다. 


그런 상미 일상에 수혁이 들어왔다. 수혁은 아이랑 아침으로 실랑이 한 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 점심으로 먹은 메뉴, 직장 꼰대 흉, 아이와 먹을 저녁 메뉴, 최근 흥하는 육아여행 등으로 상미를 웃기면서 상미에게 타인의 삶을 느끼게 해줬다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을볕이 그의 얼굴에 이슬처럼 부서졌다. 저런 각도를 연구한 걸까? 살짝 쳐든 고개는 목선을 더 유려하게 만들어 여자인 상미마저 부럽게 만들었다. 첫 만남, 첫 인상으로서는 합격이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오면서도 발길을 몇 번 돌리면서 왔는데 그 첫인상에 안심했다. 햇살을 즐길 줄 아는 남자, 낯설지만 싫지 않다. 일과 게임에 빠져 상미에게 낯선 외로움을 각인한 전남편이 떠올라 상미는 고개를 휘저었다. 그런데 눈 앞의 남자는 자연에서 온 볕을 즐기면서 다가올 시간을 깨알처럼 잘게 쪼개며 기다리는 것 같았다

수혁 : 여기 숲에 오솔길이 있는데 걸을래요? 

상미 : 그럴까봐 구두 신고 왔어요. 처음 보는 남자따라 산속에 들어갈 순 없잖아요? 

수혁 : ㅋ 그렇네. 마침 내가 산적 두목처럼 생겼고? 

상미 : 두목은 오바고 책사 정도로 해요. 손이 칼 잡을 손이 아냐 

수혁 : ㅎ 언제 손은 또 보셨대 

상미 : 날 만졌잖아 

수혁: ㅋ 그 말은 좀 심하지. 만진 게 아니라 

상미 : 아니라? 

수혁 : 잡아준 거죠. 갈피 못 잡는 갈대의 지지대랄까 

상미 : 나 소나무 같은 여자예요. 맘 잡는 데 누구 도움 필요 없어요 ㅎ 

수혁 : (가만 보다) 저기 북카페예요. 저기 가보자 


수혁은 상미의 단단함이 좋았다. 맘카페에서 많은 솔로 엄마들을 봤다. 엄마들은 모두 강하지만 맘카페, 그들만 모인 사랑방에서 힘겨운 엄마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내 아이 앞에서, 엄빠 앞에서 그럴 수 없으니 온라인에서라도 무너지고 싶었을테다. 엎어진 엄마에 선배 엄마들은 아기를 목욕시키듯 정성스레, 조심스레 토닥이고 안아줬다. 

수혁은 아빠라서 맘카페에서도 무너질 수 없었다. 그래서 수혁은 밝아야 했다. 최선을 다해 밝고 긍정적인 아빠가 되는 게 딸에 대한 도리와 자신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수혁 : 책 좀 보세요? 시간이 없죠? 

상미 : 처녀 때엔 베스트셀러 정도는 꼬박 챙겨봤어요. 시를 좋아했었고요. 지금은 애들 보는 책이나 좀 들춰보나 

수혁 : 전 출퇴근하면서 봐요 저도 소설 봐요. 연애하는 얘기들을 주로 보고요 ㅎ 

상미 : 교과서를 보시는 군요? ㅋ 

수혁 : ㅋ 저 연애 잘 하는 거 같아요? 

상미 : 모르죠. 멘트는 좀 치는 것 같고요 

수혁 : ㅎ 딸을 키우잖아요. 딸 감성이 올라오면 그걸 잘 알고 싶어요. 

        예민한 여자일테니 제가 놓치지 말아야죠 

상미 : ... 열심히 하시네요 

수혁 : ㅎ 네, 뭐든 열심히 하려고요. 육아도... 연애도? 

상미 : (꾼인가?) 육아 먼저 제대로 하고 연애를 하든가 말든가 하세요. 딸 운다 

       나도 열심히 애 마음을 알려고 심리 육아서를 택했는데.... 

수혁 : 육아 교과서는 재미 없어서 못 보겠어요. 아니, 정답지를 보는 거잖아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니 힘들어요. 그래서 쉬운 방법을 택했어요 

상미 : 그렇네. 내가 자꾸 패배감이 드는 이유가 그거구나. 이제 금쪽이도 보지 말아야겠다 

수혁 : 난 오은영쌤 열심히 봐요 ㅋ 쪽집게 강사잖아 

상미 : 뭐지? 이 배신감은? 


둘은 나란히 앉아 잠시 책을 봤다. 상미는 시집을 들었고 수혁은 소설을 들었다. 책장을 넘기다 상미는 수혁의 책을 들여다 봤고 수혁은 상미에게 시를 낭송해달라고 요청했다가 시집 모서리로 맞았다 

북카페에서 나온 둘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다. 해가 중천에 뜨니 더웠다. 아직 여름은 얄궂게 엉겨붙어 있었다. 커피까지 바닥나자 다음 코스가 필요했다. 아직 아이 픽업할 때는 아니었다 


수혁 : 저기 야구연습장에 갈래요? 배트 잡아봤어요? 

상미 : 아니 지금 가사도우미 면접 봐요? 등산에 타격에 왜 자꾸 체력테스트를 하지? 

수혁 : ㅋ 도우미 뽑을 거였으면 김치를 담가오라고 했지. 해봐요 우리. 어려워 보여도 쉬워요 


수혁은 상미를 데리고 타격장에 들어갔다. 상미에게 장갑을 끼우고 타석에 세웠다. 공에 맞지 않을 만큼 떨어진 자리에, 공을 잘 맞출 자세를 잡게 해줬다. 뒤에서 상미를 안는 듯한 모양새였다. 


상미 : 이런 수작은 고루해. 어서 나가요, 나 할 줄 알아 

수혁 : ㅎ 내가 무슨 수작을 했다구! 코칭이지!! 근데 할 줄 알아요? 

상미 : 전남편이 주말마다 야구하러 다녔어요. 사이 좋을 땐 도시락 싸들고 쫒아다녔지 


수혁은 물러섰다. 철조망 밖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상미를 지켜봤다. 상미는 모든 공을 맞췄다. 안타는 아니어도 공은 맞췄다. 순간순간의 집중력이 좋았다. '깡', '깡' 공 때리는 소리가 수혁의 뇌를 흔들었다. 

'전남편이...', '...사이 좋을 땐' ... 수혁은 상미를 안 이후 처음으로 느꼈다. 수혁과 상미 사이의 철조망은 아우슈비츠 장벽처럼 강고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상미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나왔다. 수혁은 박수를 보냈다 


수혁 : 이거 내가 제안하고서 창피할 수 있겠는 걸요? 12개 중 8개가 안타야 ㅎ 내기라고 걸었더라면 큰일 났겠어요 

상미 : 어머, 우리 밥 사기 내기했잖아요~ 까먹었어요? 

수혁 : ㅋ 그건... 애프터인가요? 

상미는 아차차 싶었지만 다른 변명을 하기는 궁색했다. 수혁이 피식 웃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수혁은 6개를 쳤다. 상미에게 져준 건지 실력인지 애매한 스코어였다. 여튼 중요한 건 내기 밥을 사기 위해 다음에 둘은 또 만난다는 것이다. 

4시였다. 집으로 향할 시간이다. 지하철역 플랫폼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가 갈 방향을 반대이나 플랫폼은 하나를 쓴다. 각각의 열차 시간은 기껏 몇분이다. 


수혁 : 곧 헤어지는데 손 한 번 잡아도 돼요? 

상미 : 악수하자는 거예요? 

수혁 : 악수는 정 없고 상미씨 손에 내 손을 포개고 싶어요 

상미 : 망측스럽게! 

수혁 : 뭐 어때요? 남들은 이런 데서 뽀뽀도 해요 

상미 : 수혁씨, 어쩌자고 손 잡으려구? 애들 소풍갈 때 짝꿍끼리 손 잡는 거 아니잖아요. 계산하고서 얘기하는 거죠? 

수혁 : 네, 한 수 두 수 고민하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대로 가버릴까봐, 사라질까봐 

상미 : 그... 그럼 못생겨서 애프터 없나 보다 하면 되지 

수혁 : 우리가 소개팅 했어요? 한 달을 우리 만난 거예요. 오늘 처음으로 밖에서 본 거지 

상미 : 난 오늘이 시작이예요.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포기는 첫 발 내딛는 순간에 결정해야 해. 아니면 상처의 크기만 커지거든 

수혁 : 우리 아직 제대로 시작 안 했잖아요. 근데 왜 벌써 포기를 운운해 

상미 : 제대로 시작하면? 지금의 즐거움이 영원해요? 우리 둘 다 수년 전 누군가와 약속한 영원에 배신 당하고 지금 이렇게 살잖아요. 

수혁 : 당신과 나 모두 사람이 문제였잖아요. 너와 내가 아니었잖아. 

상미 : 그렇게 자신만만해요? 우리 둘은 다를까? 

수혁 : 백번 양보해서 우리 둘이 그릴 미래는 누구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꼭 불행은 아니잖아요 

상미 : 끝까지, 죽을 때까지 행복한 부부가 몇이나 되겠어요. 마지막에 손 잡고 같이 묻히는 부부도 수십년은 투쟁의 역사였을 거야. 수혁씨 현실을 봐요. 우리 밭 밑은 곧 깨질 얇은 유리거나 가시밭이야 

수혁 : 지금 밭 밑이 그렇다면 다른 길로 가면 되잖아요. 내겐 더 튼튼하고 핑크빛 길이 보여요. 저기 있어. 가까워. 저기로 가면 돼. 코앞에 있는데 왜 포기해요 

상미 : 다 모르는 거잖아. 난 또 상처 받기 싫어요 

수혁 : (손을 잡고) 그래요, 영원을 자신하는 건 자만이지. 한 여름의 뜨거운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이벤트가 적어도 몇 년은 당신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잖아요. 지금처럼 그냥저냥 헛헛함 속에 평생 사는 게 얼마나 당신을 피폐하게 할지 모르죠? 

상미 : 나 별로 헛헛하지 않은데?  

수혁 : 거짓말. 내가 톡하면 바로바로 답하잖아. 밤이 되면 더 센치해지잖아 그런 게 다 증거예요 

상미 : 심심해서 그렇죠! 

수혁 : 심심하다고 느끼는 게 외롭다는 거고, 사람과 얘기하면서 푸는 게 외로움을 싫어한다는 거예요 

상미 : (얄미운 놈이다)도박을 하자구요? 수혁씨는 날 얼마나 즐겁게 해줄 수 있는데? 

수혁 : (당황) 뭐하면 즐거운데? 지난 한 달 간 나랑 연락하는 거 즐겁지 않았어요? 

상미 : 심심풀이 땅콩 정도? 땅콩에 내 미래를 투자할 순 없지 

수혁 : 땅콩을 매일 그렇게 퍼먹으셨나? 고지혈증 오겠네 

상미 : (당황) 수혁씨는 사람 만나는 거 안 무서워요? 

수혁 : 안 무서워, 그리웠어요, 사람이. 딸 재우고 거실에서 혼자 티비 보면서 맥주 먹는 게 낙이었어요. 어느날 딸이 잠 깨서 나오더라구요. 그러더니 “아빠는 왜 티비랑 얘기해?” 하더라구. 내가 티비 보면서 그 속의 사람들에게 맞장구 치고 추임새 넣고 했나봐. 집에 와서는 애 말고 얘기한 대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외로웠나봐. 그래서 그 전에는 안 보던 티비를 봤나봐. 난 사람이 그리웠나봐요.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잘 버텨야 한다’라는 책임감이 강박이 됐나봐요. 이제 나도...편하게 살고 싶어 


수혁의 눈이 착해졌다. 민망했는지 수혁은 열차가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미의 눈은 어른스러워졌다. 상미는 천천히 수혁을 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수혁이 아들처럼 느껴졌다. 외로웠구나, 너도 힘들었구나, 많이 참았구나... 속으로 말하며 토닥였다. 상미를 안은 수혁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 사이 서로의 열차가 두어 대 지나갔다.  

 

상미 : (얼굴이 붉어진다) 내가 오늘 크게 인심 썼네요. 외간남자에게 품을 주다니 ㅎ 

수혁 : ㅎ 크다 생각만 했는데 당신 품은 정말 크군요 

상미 : 그게 피지컬을 말하는 거면 그간 즐거웠습니다 

수혁 : 에이 계속 얘기했잖아. 난 사람 마음 본다고 ㅋ 

상미 : 오늘 즐거웠어요 

수혁 : ‘그간’에서 ‘오늘’로 바뀐 건 내일이 있다는 거군요? 

상미 : (독심술을 하나?) 몰라요. 집에 가다 또 마음이 바뀔 수 있으니 ㅎ 난 갈대같은 여자니까 

수혁 : ㅋ 앞으로 소나무라고 부를게요 

상미 : 왜? 품이 소나무급이었나? 

수혁 : 아냐~ 앵두나무 같아. 내 안에 들어오면 보이지도 않겠어요. (상미 입술을 가리키며) 앵두는 요기 열려있네 

상미 : (기겁한다) 저렴한 멘트가 영식이급이네요. 그만 가요 

수혁 : 가세요. 가는 거 보고 갈게요 

 

상미가 차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상미는 빈 자리에 앉지 않고 의자 앞에 섰다. 수혁은 상미를 따라 앞으로 가 섰다. 상미는 고개를 돌린다. 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혁은 그런 상미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손을 들어 흔들었다. 열차가 움직이자 상미도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상미는 수혁이 달리는 열차를 따라올까봐 겁났다. 그딴 짓까지는 볼 수 없는 감성이다. 다행히 수혁은 잠시 손을 흔들다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등판이 커보였다.  

‘내가 저렇게 큰 허우대를 안았나?’  

‘나도 저 어깨에 안길 수 있을까?’ 

상미는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떨어뜨려 멀어지는 수혁의 어깨에 포갰다.  

아이가 잠들었다. 같은 밤인데 오늘밤은 더 사위가 조용하다. 아직 수혁은 상미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상미가 만약 '끝'을 고한다면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심각할 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너스레 떠는 게 묘수가 될 수 있다.


수혁 :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피곤하지 않아요? 혹시... 아직도 가슴 뛰어서 못 자는 거 아냐? ㅋㅋㅋ>


딩동.

상미에게 메시지가 왔다. 


상미 : 당신과 하고 싶은 게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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