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내릴 장소로 그 육교를 정한 건, 최근 일 년간 그곳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 육교를 지나야 산부인과에 갈 수 있었다.
다리가 부었어도,
배가 불러와도,
현기증이 나도,
불같은 태양이 검은 머리를 불태워도
뜨거운 계단을 밟아야 했다.
뱃속에서 커가는 내 새끼를 위해.
그 아이가 태어나 백일도 안 된 겨울의 어느 날
난 차디찬 계단을 다시 밟았다
아이는 아기띠 속에서 곧 닥칠 서슬 퍼런 운명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죽어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그 육교가 떠올랐다
높지 않아서 한 번에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난 여름, 그 육교를 걸을 때마다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었다
다섯 계단만 더 오르면 육교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휘청
몸이 흔들렸다
손이 붙을 것 같이 차가운 난간을 꽉 잡았다. 품 안의 아이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시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발을 옮겼다.
하나, 둘
세상이 흔들리고 하늘이 뒤집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나를 깨웠다. 눈을 뜨니 구급차 안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이 때문에 밥을 챙기지 않았더니 빈혈이 심해졌다
두어 시간 링거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시어머니가 집에 와있었다
"너 뭐 하자는 거니? 백일도 안 된 애를 왜 데리고 싸돌아다니니? 애가 다치기라도 했더라면 어쩔뻔 했어!"
'어쩔 뻔 했어!'라는 외침이 내 폐부에 날카롭게 꽂혔다. 숨이 막혀왔다. 백일 전 저 말을 들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출산을 몇 주 앞둔 만삭의 어느 날 남편이 응급실에 실려갔다
술을 먹고 운전대를 잡은 채 갓길에 주차된 트럭으로 돌진했다
알코올의 명령이 아니었다
남편의 선택이었다
내게 외도를 들킨 남편은 죽어서 사죄하겠다고 그 난리를 벌였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외도한 것보다
죽음으로 용서 받으려한 그 시도가 더 비열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 위에서 헐떡이는 그 새끼보다
죽어서 편히 눈 감고 지낼 그 새끼가 찢어죽이고 싶었다
그 분노를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터트리지 못하고
쓰디 쓴 설움을 삼키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도착했다
두 손에 고개를 파묻은 내게 소리쳤다
"쟤가 죽어야 속이 시원했어! 진짜 죽으면 어쩔 뻔 했어!"
내 평생을 옥죄는 말이었지만 그 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손이 떨렸고 숨이 막혔고 사타구니가 뜨거워졌던 거 같은데
정신을 차리니 딱딱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죽어야 했구나.'
중력보다 무거운 이 생각에 짓눌려 있을 때
내 새끼가 배를 찼다. '엄마 일어나.'
그 후로 남편은 또 여자가 있는 집을 들락거렸고 두 번 참다 세 번째엔 육교에 올라섰다
어쩌면 하늘이 준 두 번의 기회를 나는 잡지 못했나보다
남편이 돌진한 트럭에 폭탄이 한 가득 실어있었더라면
육교 계단에서 내가 미끄러졌을 때 머리부터 떨어졌더라면
아쉬워하는 사이에 아이는 커갔고 두 눈은 별처럼 빛을 품었다
그래서 더 살기로 했다
아들이 더 잘 살기를 바래 시어머니는 남편을 데려갔다
사업을 시작하게 해준다는 명목이었다
나는 아기와 둘이 2년여를 살았다
처음엔 매일 눈물로 보냈지만
한 달이 지나서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웃었고
일 년이 지나서는 시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나와 아이는 더 잘 살게 됐으니까
남편은 주말마다 와서 아빠 노릇을 하고 남편 노릇을 했지만 장난감 대여점에서 제법 기능 좋은 장난감이 도착한 느낌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죽을 용기도, 이혼에 힘쓸 기력도 없었기에 '그냥' 살았다
시어머니는 애를 보러 온다는 핑계로 격주마다 집에 왔다
애를 보러 왔는데 왜 냉장고와 베란다를 더 열심히 보는지
애가 예뻐 온다면서 말도 잘 못하는 애에게 왜 잔소리를 늘어놓는지
내게 화만 낼 거면서 왜 며칠을 자고 가는지
시어머니가 오시면 나는 늘 의문 속에서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게 좋은 거지' 주의자라서 나는 친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안 하고 살았다
내 주위는 자연스레 평화가 지배했기에 큰소리 없이 살아왔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큰소리를 접했을 땐 당황>황당>무서움>침묵 순으로 받아들였다
보통은 분노나 투쟁의 단계로 대응한다던데 내 인간관계 스펙트럼에는 그런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검고 깊은 침묵으로 침잠했다
나를 더 가라앉히면서 시어머니의 말에는 순응의 뜻이 담긴 탄력 있는 말을 던져올렸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께 착하고 귀한 며느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말 잘 듣고 착하지만 답답한 며느리로 생각했다
남편이 존재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편은 나를 대신해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싫어했다
어머니를 쫒아내기도 하고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 질주에 제동을 건 건 미련하게도 나였다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부모님에게 받고 자란 나는 누구보다 유교걸이었고
부모님과 의절한다는 패륜은 내 인생에 이혼보다 더 큰 오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의지로 어머님과의 끈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음양의 극단에 있던 우리 둘의 간극은 더더욱 벌어졌다
시어머니는 우리집 가장이라도 되는양 더 살림에 관여했다
육아에서는 절대적인 원칙을 다섯 살 아이에게 강요했다
며느리에게는 탄력적인 잣대로 모든 품행을 평가했고 목표는 오로지 비난이었다
어느 날, 갓 지은 밥의 열기를 밖에서 불어온 초여름 순풍이 식히던 저녁이었다
딸이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식탁에 놓고 케첩을 뿌리고 있었다
두어 개에 계란이 수놓아지는데 시어머니의 젓가락이 나타나 케첩을 사납게 쳤다
"애만 먹일 거니? 우리 껀 케찹 뿌리지 마."
'우리'는 누구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당황해서 케첩을 내려놓았다
"할머니 나는 케첩 뿌린 거 좋아해요."
시어머니 눈이 번뜩였다
-"엄마가 00이 꺼는 또 해줄게."
아이 눈이 번뜩였다
"우리 엄마도 케첩 뿌리는 거 좋아하고 아빠도 좋아해요. 할머니만 싫어해요. 그러니까 케첩 더 뿌려도 돼요."
계란말이가 날아갔다
시어머니가 일어섰다
"버르장머리 없이 할머니에게 대들어? 니 입이 아빠, 할머니 입보다 중요해? 너 내가 해준 게 얼만데 감히 이딴 걸로 버릇 없게 굴어? 너 돼지가 되고 싶은 거야? 돼지처럼 살래?"
순간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날의 육교 위에 올라선 내가 보였다
내 품에 저 아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나는 손으로 아이를 감싸고 발 아래 흐르는 차들을 내려보았다
그날 나는 내 몸을 던져 저 차들에 깨지고 싶었다
육교가 아닌 식탁에 선 나는 내 몸을 던져 그날의 차들을 깨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머니!" 난생 처음 누군가에게 악의와 분노와 살의까지 더해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우리 애에게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10여분 시어머니에게 분노했다
시어머니에게서도 화살이 날아왔지만 뇌로 듣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싸움은 아이가 종결지었다
"난 할머니 싫어요! 집에 가세요. 난 우리 가족하고만 살고 싶어요. 할머니 안 보고 싶어요!"
아이를 방에 보내고 진정시켰다
우리 둘은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고 오래도록 사랑을 표현했다
시어머니는 문 밖에서
나와 딸에게 분노를,
나에게 적의를,
하늘에게 원망을,
자기 팔자에 설움을
한참 쏟아내다 떠났다
그 날 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로 남편을 불러냈다
남편에게 선언했다
"나는 며느리로 살지 않겠다
나는 우리 딸의 엄마로만 살겠다
너의 아내로도 살지 않겠다
나는 온전히 나로만 살겠다
나에게는 아이만이 의미있다
이게 이제부터의 나다"
40여년 익숙했던 내 성향과 세계관을 바꾼 날이다
40여년의 세월은 기대보다 강하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일 년 후 아프다는 핑계로 들낙거렸다
남편은 삼 년 후 늙었다는 핑계로 사랑을 갈구했다
사춘기를 앞둔 아이에게 나의 사춘기가 투영됐다
그 시절 나는 불편한 호르몬의 들쑤심을 엄마의 사랑으로 제어했다
우리 아이에게는 또래보다 큰 나쁜 기억이 있기에 사랑이 더 필요했다
나는 남편과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도 여느 가족처럼 주말에 같이 여행가고
평일에 하루 이틀은 외식을 하고
같이 쇼파에 앉아 예능 프로를 보고
토요일 하루 정도는 거실에 토퍼를 깔고 같이 잤다
그렇게 노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의 새로운 각오와 함께 약의 도움도 있었다
공황장애는 내게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자명종 같은 알람이었다
'너 좀 쉬어야 해'하는 알람.
무릎 수술을 해야 한다고 '오랜만에' 시어머니가 우리집에 왔다
2년 전에도 무릎에 뭘 한 거 같은데 또 한다고 한다
이제는 나도 독해져 '언제쯤 아예 못 걸어서 우리집에 안 올까.' 상상하기도 한다
첫째 날 병원 검사를 다녀오더니 일주일 있다 간다고 하셨다
식탁에 있던 약을 털어넣었다
삼일째 저녁에 입맛 없어 못 드시는 것 같아 매콤한 메뉴를 배달시켰다
"너는 일도 안 하고 살림하는 애가 배달이 뭐니?"
우리가 말을 섞은 게 얼마만이지?
몇 년을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는데 이 질문은 답을 원하는 거였다
-"제가 왜 일을 못하는데요. 어머니와 애아빠 때문에 공황장애 생겨서 못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니가 친정에서 달고온 병을 왜 우리 탓을 하니? 정신병은 유전이랬어!"
노인네의 신념을 과학이 이기지 못하는 걸 알기에 나도 큰소리로 맞섰다
늙었는지 집에 안 오던 일 년이 괴로웠는지 어머니는 일찍 싸움을 끝냈다
다시 이삼일 후 집에 가신다기에 딸을 데리고 인사하러 나오니
현관에 의자를 놓고 한 달 전 꿈과 열정을 모아 인테리어 한 나의 현관 벽에 뭔가를 붙이고 있었다
아치형 전신 거울 위, 화이트 템버보드에 샛노란 종이에 끔찍한 빨간 그림이 그려진 부적을 붙였다
의자에서 내려서면서 부적보다 끔찍한 말을 던져놓고 그녀는 나갔다
"아무래도 집에 귀신이 잘못 들어온 거 같아. 저거 떼지마! 얘 사업 망한다.
어휴, 내가 없으면 어쩔 뻔 했어."
내가 정성껏 만든 현관 벽에 부적을 붙였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 말이었다
내 병을 운운하더니 왜 아들 사업을 위해 부적을 붙이는지
그 잘난 아들이 일을 못해서 망해가는 사업인데 왜 부적에 기대는지
백번 양보해서 우리집에 문제가 있다손 치더라도 왜 해결을 당신이 하는지
당신이 있어 안심이라는 자화자찬의 끝맺음 '어쩔 뻔 했어.'
그래 당신이 없었더라면 우린 어떻게 살았을까
아니 나와 아이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제 나만큼 큰 아이와
조금은 희미해진 나쁜 기억들,
이제는 뭐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갈구하는 욕망...
이들이 있기에 이젠 '어쩔모자'를 뺀 나의 앞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