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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Sep 04. 2024

[E] 투명인간이 된 친구

중학교에서 만난 W는 키가 190cm에 달했고 덩치는 산만했다

그 덩치에 눈은 소처럼 커서 우리는 걔를 '소'라고 불렀다

그놈의 성이 '우'씨였던 건 운명적인 우연이었다

우리는 W를 우가로 불렀다


우가는 덩치에 안 맞게 순박했다. 소처럼 순했다

덩치 있는 애들의 패거리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장난을 쳐도 헤헤 웃으며 소처럼 큰 눈을 껌뻑였다

힘이 쎄서 씨름부였지만 무단히 해코지 한 적은 없다

그는 정말 소처럼 순박했고 소처럼 여유로웠다


지난 연휴에 우린 고향 근처에 가서 모였다

중딩때부터 이어온 다섯 친구의 모임이다

이제는 애까지 딸린 대가족의 모임이 됐다

우가는 큰 딸하고 둘이 참석했다


우가는 없는 듯 지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시골 사는 여느 아이들처럼 책보다 삽을 더 잡던 애였다

그렇게 중딩을 보낸 그는 지역의 농고에 진학했다

농고는 불행히도 삽보다 술병을 더 잡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가는 우직히 삽을 잡았다

달라진 건 고딩이 됐으니 좀 더 큰 삽을 잡았다는 것

우가는 졸업 하자마자 포크레인 기사가 됐다


시골에서 포크레인을 하는 우가는 결혼이 쉽지 않았다

서른 중반을 넘어서 선을 보고 일사천리로 결혼했다

신부는 남도의 큰도시 처자였고 우리는 환호했다


모임 첫날, 저녁 상을 물리고 술판을 시작했는데

우가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뒷짐을 지고 바다를 향한다

우가와 인근에 살아 가깝게 지내는 P가 말한다

"저 새끼 속이 지금 말이 아니다"

우가의 딸은 아이들 무리와 방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참이다

"작년 모임에도 딸만 데리고 왔잖아. 5월 모임에는 안 오고.

저 새끼 이혼했단다."


우가는 늘 친구가 많았다

중딩 때도 고딩 때도 사회에서도 많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해 인상과 다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그 놈이 이혼을 했다. 그것도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결혼 5년차에, 두 번째 딸이 이제 막 말을 시작했을 때

우가의 아내는 이혼하자고 했다

"왜?"

-"집을 하나 더 사고 싶은데 세금이 문제예요"

삽질만 하던 놈에게는 생소한 논리였다

아내는 2주택이 되는데 세금이 많이 나오니 서류상 이혼을 하자고 우가를 설득했다고 한다

강남 10억 아파트도 아니고 지방 소도시 2억짜리 아파트 2개를 사면서...

우가는 방어했지만 소가 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우가는 덩치에 안 맞게 작은 포크레인을 몰았다

언젠가 넌 왜 큰 거 안 모냐고, 큰 걸로 도로공사 같은 걸 하지 않냐고 물으니

"큰 거는 빚을 많이 내야 해. 리스크가 커."

그렇게 작은 포크레인에 소를 밀어넣으며 그는 돈을 모았다

33살에 그래도 살 집이 있어야 여자가 생기지 않겠냐며

인근 소도시에 그간 모은 돈으로 아파트를 마련하는 걸 보고 우린 역시 "소처럼 일하는 놈"이라고 칭찬했다

그런 그가 아파트 투자를 명목으로 이혼을 당했다


우가는 바다에 가서 2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

우가는 2시간 동안 화장실도 안 가고 술을 마실 줄 아는 놈인데 2시간 째 술자리를 비웠다

바다에서 돌아온 우가는 자리에 앉더니 불멍을 시작했다

불은 활활 타오르는데 우가는 묵묵히 입을 닫았다

방 안에서 아이들 노래 소리가 들렸다

우가의 소눈방울에 흔들리는 불꽃이 피었다

우리는 잔을 들어 소주를 넘겼다


"나는 집에서 투명인간이다. 없는 사람 취급 받는다."


아내는 첫째 출산 후 육아를 이유로 언니네 집으로 들어갔다

우가는 신혼집을 전세 주고 처형네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다 더 큰 집이 필요해 아내 명의로 집을 산다

아니 아내가 아니다. 부동산 계약서와 이혼서류에 동시 날인했으니 전부인의 집이다

처형의 남편, 우가에게 손윗동서는 세무사이다

싸가지 없는 세무사이다

우가가 인사하러 처갓집에 갔을 때

동서는 그날 아이들에게 "너희 공부 안 하면 저 삼촌처럼 삽질한다."고 했단다

아무리 소같은 우가라도 주먹을 날릴 일이었으나 결혼을 해야했기에 참았다고 한다

그후 세무사의 무시는 처형과 아내에게 전염됐다


우가가 돌도 안 된 첫째를 안고 모임에 왔을 때 우리는 모두 웃었다

고목나무에 매미. 딱 그 풍경이었다

우가는 매미를 품은 고목나무처럼 딸을 아꼈다

1박하는 모임 내내 우가는 기저귀를 채우고 젖병을 소독해 분유를 주고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안고서 재웠다

"오빠 참 잘한다" 아내들이 칭찬하자

아이 엄마는 "오빠 잘하죠. 전 아무 것도 안 해요"라고 해 나머지 남자들은 아내들의 기습 째림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우가는 일을 하고 들어오면 애 보고 살림 하느라 새벽이 온지도 모른다고 했다

기저귀, 분유 따위를 사는 일도 우가 몫이었다


둘째가 태어나자 처가살이는 더 불편해졌다

따로 집을 옮겼다. 처형네 아랫집이고 역시나 전부인 명의다

이때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우가는 첫째 때와 달리 둘째 육아에는 손을 놨다

"첫째 때 아무 것도 안 하는 아내를 보니 너무 억울했어"

아내는 둘째 기저귀를 채우고 분유를 타면서 잔소리가 늘었지만 우가는 첫째와 노는 데 집중했다


처형과 세무사는 두 번째 고비를 가지고 등장한다

처형이 땅을 샀다. 맹지이나 개발 계획이 있단다

땅이 엉망이기에 고르게 작업할 필요가 생겼다

처형은 우가에게 포크레인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우가는 바로 출동했다

땅은 컸고 일은 많았다

우가 회사에서 우가를 찾았다

여름은 성수기이기에 우가는 회사 현장으로 가야했다

"안 도와줄 거면 나랑 진짜 이혼할 생각하고 가세요."

아내 입에서 두 번째 이혼 얘기가 나왔다

'그게 뭐라고. 급한 일이 아니니 쉬는 날 와서 하면 되는데.

급한 거면 돈을 내고 그 동네 포크레인을 부르면 되는데.'

우가의 말은 벽에 막혔고 둘의 골은 깊어졌다


"먼 현장이라 며칠 거기 숙소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갔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

저 사람 귀가 먹었나? 싶었는데

그때 딸이 멀리서 '엄마'하고 부르니까

'응'하고서 가대?

그때부터였어. 내게 말도 안 하고 내 말에 답도 없어.

빌어도 보고 화도 내봤는데 아무런 답이 없어.

산 같어. 미동도 없이 집을 지키고 있어.

진짜 산이면 포크레인으로 파서 달라질 수 있을 건데

이 산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 그래서 무섭다."


부부의 일은 모른다

아내 말도 들어봐야 한다

소같은 우가가 답답했을 수도 있다

육아에 손 놓은 남편이 미웠겠지

처가 일 안 도와줘서 면이 안 섰을 수도 있다

엄마 같은 언니가 화를 내니 난처했겠지


"올해부터 본가에서 산다

주말에만 집에 갔다

얼마 전부터는 격주로 간다

같이 있으면 답답하니 나도 스트레스더라고

그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가

내가 가면 애들이 다 달려들어서 앵겨

잠도 나랑만 자려고 해

근데 그 귀여운 놈들을 품지를 못해

그래서 보고싶어도 참아

아빠가 짜증내는 얼굴을 덜 보여주고 싶어."


그만 찢어져라

애들 데려 오고 완전히 갈라서라

집은 어떻게 찾을 거냐?

...우가 친구인 우리는 울분을 토해냈다


"딸들인데 나보다는 엄마가 키우는 게 낫겠지

아직 포기는 안 했어. 방법을 찾아야지."


2박3일은 방법을 찾기에 짧았다

술로 진탕이 된 이틀을 끝내고 우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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