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짜증이 나 있었다. 폭염특보가 내린 날이었는데, 나는 종로3가를 가야 했고 또 끝내지 못한 문서작업들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고 그 와중에 수술 일정을 잡아야 했고 검진 예약도 잡아야 했다. 시끄러운 1호선 안에서 나는 이 병원 저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계속 예약을 했고, 계속 예약을 취소했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안내 방송이 나올 때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네?"가 쏟아졌다. 나는 내 주민등록번호를 몇 번이고 다시 불렀다.
종로 3가는 그늘 한 점 없었고, 사람은 언제나처럼 많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폭염 속에서 세운상가는 새하얀 접시 위에 놓인 초콜릿케이크처럼 보였다. 언뜻 햇빛에 외곽선이 녹아내리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그 흰 접시 위를 걸어가다가 문득 내일 예약한 검진 시간에 업무 미팅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시 예약을 잡을 수 있는 병원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생각은 나지 않고 그냥 열기에 숨이 막혔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부옇게 뒤섞였다.
세운상가 내부는 서늘한 그늘이었다. 온도가 낮지는 않았는데, 새하얀 햇볕이 가려진 회색 색조만으로도 충분히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으로 돌아서 반층, 다시 반층을 올랐다. 다리가 무거웠다. 목적지는 5층이었는데, 한 층을 걸어 올라서야 엘레베이터를 보았다. 세 면이 유리로 된 엘레베이터가 뜨거운 얼음처럼 멈춰있었다. 또 숨이 막혔다. 뭘 생각해내야 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문득 엄습했다.
5층, 그리고..., 그리고 병원 검진 예약과 예약 취소, 생각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레베이터 안의 공기는 바깥과 비길 바 없이 뜨거웠다. 두 층을 올라가는 그 장구한 시간동안 나는 내 발끝을 내려다보며 5층, 병원, 5층, 병원, 하고 중얼거렸다. 머리가 익어버릴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새하얗게 햇빛을 받고 있는 옥상에서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햇빛은 여전했는데, 흰 옥상 바닥은 하늘색의 하늘과 붙어 있었다. 조용했다 번화가의 번잡함에서 문득 끌어올려진 것 같았다.
복도는 네모난 회색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고, 옥상 한 켠에는 녹색 플라스틱 의자가 조르륵 놓여 있었다. 상가인데 인적이 없었다. 그냥 멈춘 것처럼, 하늘은 새파랗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햇빛은 모든 것의 모서리를 뚜렷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림자는 새카맣게 멈춰 있었다. 한쪽으로는 인왕산이, 맞은편으로는 종로의 건물들이 눈높이에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그늘이 너무 뚜렷해서 오히려 멀고 가까운 곳의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한 숨을 한 번 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햇살은 여전히 말 그대로 작열하고 있었지만, 그늘진 복도로 들어서지 않고서도 바글바글 끓던 심사가 어느 새 잠잠해졌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녹색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따끈하게 달궈져 있었다. 그늘은 없었는데, 정신 사납게 밝지도 않았다. 차가운 단맛이 혀 끝을 식히고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숨을 내쉬었다.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