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대에서 마디그라 퍼레이드까지
누구나 두 개의 고향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한 고향. 나에게 두번째 고향을 물으신다면, 언제나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5년을 살면서도, 1인 가구를 위한 가장 완벽한 동네라고 매일 매일 칭찬해 마지않았던 나의 망원동! 망원동에 살면서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공항철도를 타고 저렴한 가격에, 빠르게, 인천공항까지 갈 수 있다는 거다.(그 밖에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설명하고 싶다.)
작년부터 어쩌다가 부산 해운대에서 살고 있는 내가 인천 공항에 가려면 매우 복잡해진다. 부산-인천 환승전용 내항기를 따로 예약해야하고(대한항공 콜센터에서 전화하면 간단하게 예약이 가능하다), 김해공항 국제선 인터넷 면세품 수령 방법(김해공항 국제선에서는 모든 면세품 수령이 가능한데, 방법은 검색할 필요도 없이 그냥 가서 찾으면 된다) 같은 것을 검색해봐야한다.
나와 비슷한 시간에 서울 집에서 출발한 J는 나보다 조금 먼저 인천 공항에 도착해있었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비지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해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의심이 많은 J는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을 의심했고, 사려깊은 J는 같이가는 친구도 함께 업그레이드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성적인 J는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지인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친구도 함께 업그레이드가 안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해봤다고 했다. 그래서 결론은 의심많고 사려깊고 이성적인 J가 내 옆자리가 아닌 비지니스석에 앉아 시드니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리만 비지니스고 기내식은 이코노미로 주냐는 질문에 J는 대답대신 맥주를 사줬다. 장거리 비행전 공항 펍에서 마시는 맥주는 항상 옳다. 그리고 우리는 10시간 후 따로, 또 같이, 시드니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B가 사는 골드코스트까지 직항이 없기에, 시드니는 지나가는 목적이었으므로, J와 나는 처음부터 시드니에 큰 기대가 없었다. 시드니에서 꼬박 2박을 해야했지만, 나와 J는 저녁을 먹을 근사한 식당 조차 미리 찾아보지 않았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호주 여행책(여행지에서 잠들기 전에 그 나라 여행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 가보지 못한 곳, 일정상 내일도 가지 않을 곳이지만 맘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택시타고 갈 수 는 곳에 와있다고 생각하면 묘하게 설렌다.)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에 '짐이 많으면 택시를 이용하는게 편리하다'라고 써있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다시는 펼쳐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여행책을 모으는 사람이 있다면 'ENJOY 호주'는 사지 마시길.) 그래서 아무 기대도 없이 계획도 없이 시드니에서 2박을 해야했던 J와 나는 구글맵이 이끄는데로 움직였다. J와 외국여행은 처음이였지만, 우리 둘다 여행지에서 꼭 가야만 하는 곳은 없었으며 꼭 먹어야 할 음식도 딱히 없는 탐욕없는 여행자 타입이었다.
시드니에서 이틀동안 우리는 하루 두 군데 정도를 둘러봤고 중간중간 배가 고프면 구글맵에서 평점이 좋은 음식점을 찾아갔다. 호텔 직원이 추천한 커피숍에서 폴바셋의 나라다운 커피를 맛 본 후, 나는 하루에 커피는 세 잔,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우리가 시드니에서 뭐했냐면, 시드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문대 잔디에 나란히 앉아 굳이 천문대까지 올라와 운동을 하는 남자 젊은이의 팔 근육을 하염없이 바라봤으며, 본다이 비치에서 피시앤칩스를 꼭 먹어야한다는 B의 지령을 받고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집을 찾아가기도 했고, 한국에서부터 유일하게 준비해간 일정으로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봤으며, 호주 유학생활을 했던 한 친구가 시드니 현대미술관 앞에서 아, 이곳이 천국인가 보군, 싶었다던 그 길을 걸어보기도 했다. 같은 시간, 역대급이라는 한국의 미세먼지 뉴스를 찾아보며 누구나 호주에 살고싶어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이제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J는 시드니에서 마디그라 페스티벌 퍼레이드에 갔던 얘기를 꼭 써달라고했는데 J가 직접 쓰지 않은 이유는 별로 쓸 얘기가 없고, 제대로 나온 사진도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막상쓰려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몇 문장 써보자면). 첫째날 저녁에 세계 최대의 성소수자 축제라는 호주 마디그라 페스티벌 페레이드가 있었다. 우리는 퍼레이드를 보고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는 계획으로 나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규모가 매우 큰 축제였다. 퍼레이드를 구경나온 호주 젊은이들은 한손에는 '좋은데이 자몽맛'을 다른 한손에는 레인보우 깃발을 들고, 누군가는 그저 심플하게 레인보우 팬티만 입고 있기도 했다. '좋은데이 자몽맛' 원산지에서 온 우리는 레인보우 머리띠라도 착용해야하는 것 아닐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마저 적극적이지 못했다.
너무 잘생겨서 고개가 절로 돌아가는 남자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나 J는 "게이야"라고 속삭여줬다. 어떻게 얼굴만 딱 보고 알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데, J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며 오히려 나를 타박했다. 대학 다닐때 교양수업 같이 듣던 남자분에게 종강날 먼저 다가가 술을 마시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무르익어가는 여름밤 술자리에서 여자친구가 있는 바이섹슈얼이라 말을 듣고는 한 학기 동안의 짝사랑을 아프게 접어야 했다. 현재 여자친구가 있는데다가 언제 남자를 사귈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겐 너무도 장벽이 많아보였다. 그때도 돌아온 친구들의 얘기는 어떻게 딱 보면 모르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정말 모르겠지만 안다고 달라질게 있겠는가. 어차피 잘생긴 남자는 게이어도 게이가 아니어도 못사귄다.
호주 마디그라 페스티벌은 대체로 감동적이었다. 전세계에서 축제를 즐기러온 사람들, 온통 레인보우 거리도 감동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한복을 입고 북치고 장구를 치는 반대 집회가 없다는 것이 참 그러하였다. "동성애는 유전이 아닙니다" "꼭 돌아와줘. 기다릴게" "땀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 따위의 반대 집회 현수막은 한국 고유의 것이었다. 레인보우 거리로 나온 남녀노소 누구나를 위한 축제였고, 모두가 들떠있었다. 호주의 경찰, 공무원, 해군에서도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하여 레인보우 거리를 신나게 행진하기도 했다. 퍼레이드는 끝날 줄 몰랐고 동성애 반대 집회의 원산지에서 온 우리는 이제 그만 저녁을 먹으러 가야했다.
시드니에서 제일 맛집을 물으신다면 단연코 마그리다 페스티벌 인파 속을 빠져나와 1시간 가량을 헤맨 끝에 찾아낸 타이 음식점이다. 나와 J는 이곳에서 첫번째 저녁과 마지막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이제와 생각해봐도 내가 가본 호주 제일의 맛집이었다. 두번째로 맛집은 시드니에서 둘째날 역시 1시간 가량을 고민하다가 들어간 인도네시아 음식점이다. 호주에서 맛집을 찾는 방법은 참 쉽다. 그냥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아시안 음식점에 가면 된다. 커피는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지만, 아시안 음식 빼고는 먹을 게 없는 나라. 이것은 호주 여행책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 고급 정보다.
ChatThai : 20 Campbell St, Haymarket NSW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