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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만, 괜찮지 않은 날들

식탐과 치킨

by 춤추는나뭇가지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배가 고파서 먹은 게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늘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입이 심심해서, 입안이 허전해서, 아니, 마음이 허해서. 끝도 없이, 끊임없이. 중독자처럼 먹어댔다. 음식은 내 허기를 채우기는커녕 또 다른 허기를 불러오는 존재 같았다.


다이어트를 해보려고 식단을 조절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간절해졌다. 굶으면 오히려 허기가 더 치열하게 몰려왔다. 어떤 사람은 "물 마셔 봐요. 갈증을 배고픔으로 착각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내게는 그조차 해당되지 않았다. 물은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 같았다. 나는 갈증이 무척 심해지기 전까지는 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녁 9시쯤이 되면,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손길은 점점 절박해졌다. 냉장고가 비어 있으면 ‘다행이다’ 싶다가도 곧장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 마트로 향했다. 밤늦은 시간에도 라면을 사고, 달걀을 풀어 넣고 김치를 썰어 넣어 끓였다. 먹는 순간은 정말 행복했다. 따뜻한 국물, 퍼지는 짠맛과 매운맛.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은 만족감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가 부르자 금세 기분이 뒤바뀌었다. 몸은 무겁고 속은 더부룩하고, 머릿속에는 죄책감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이걸 멈추지 못할까.”

나는 스스로를 미련한 사람이라며 비하하고, 자책하고, 또다시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엄마의 간병을 위해 5년 전 친정 근처로 이사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식탐은 더욱 심해졌다. 혼자 있는 집에서 치킨을 시켜 먹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작은 시골 마트 안에 있는 치킨집에서 사 온 치킨은 놀랍도록 맛있었다. 그 뒤로 나는 동네 치킨이든 프랜차이즈든 가리지 않고 치킨만 찾았다. 어떤 집이 더 맛있는지 훤히 알 정도가 되었고, 치킨은 내 주식이 되었다. 밖에서 누굴 만나는 일이 없을 때면, 집 안에서 낮이든 밤이든 치킨을 먹었다.


‘이럴 바엔 아예 질릴 때까지 먹어보자.’


그 순간,『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조르바가 버찌에 빠져 그것만 먹다 결국 토하고 나서야 버찌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는 이야기.


나도 그처럼 끝까지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미련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실컷, 마음껏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치킨이 내 집 현관 앞으로 배달됐고, 두 마리를 시켜도 혼자 다 먹었다.


그렇게 1년, 2년이 흘렀다. 치킨은 늘 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포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치킨을 생각했고, 가끔은 배가 불러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순간이 찾아왔다. 치킨을 먹다 말고,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을 내려놓았다. 먹다가 중간에 멈춘 건 처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며칠 지나자, 다시 치킨이 당겼다.


그래도 변한 게 있다면, 가끔은 치킨을 남겼다는 것이다. 예전엔 절대 남기지 않았던 음식을.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식탁 위에 남겨둔 식은 치킨 한 조각을 먹게 됐다. 늘 따끈하고 부드러운 치킨만 먹던 내가, 퍽퍽하게 식은 치킨을 먹었다. 그 퍽퍽함이 이상하게도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한 마리를 시켜 반은 저녁에, 반은 아침에 먹는 습관이 생겼다.


치킨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모양을 바꿨을 뿐이다. 아침에 식은 치킨을 먹고, 저녁에는 다시 따끈한 치킨을 시켜 먹었다. 치킨은 내 일상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몸이 무거워졌고, 체중은 계속 늘었다. 방 안은 점점 어질러져 갔다. 양말, 메모지, 과자 부스러기, 빈 음료수 병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싱크대에는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이 쌓여 있었고, 심지어 천장에는 큰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다. 그릇 하나를 들자, 바퀴벌레 떼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나는 욕망의 실체를 마주했다. 나는 음식을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음식에게 먹히고 있었다. 그건 단지 식탐이 아니라 자기 파괴였다.


나는 욕망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욕망은 더 집요하게 되살아났다.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더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 욕망이었다. 욕망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라,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할 그림자였다.


일터인 유아숲체험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도 늘 긴장을 숨겨야 했다. 인솔자도 모두 나와 같이 업무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긴장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말을 할 때도 여유가 생겼고, 자신감도 붙었다.


한때는 실컷 먹고 나서야 비로소 질릴 대가 오기도 했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음식에 대한 욕망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내가 허기졌던 건 배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그 시간이, 끝없는 식탐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치킨 배달은 일주일에 세 번에서 두 번으로,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었다. 가만히 있어도 치킨 생각이 나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누군가 옆에서 치킨을 시켜도, 한두 조각 먹고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일부러 꾹꾹 참고 견디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리워지지 않은 날이 왔다.


내가 나를 살피고 돌봐주지 않으면, 어떤 음식도, 누구의 인정도, 무엇 하나 나를 대신 채워줄 수 없다. 욕망은 억누르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다른 얼굴이었다. 결국, 내가 느꼈던 허기는 내 안이 보내는 신호였다. ‘조금만 나를 더 들여다봐 줘’, ‘지금 너무 외로워’라고 말하는, 내 안의 작은 소리였다. 내 안에는 수많은 작은 소리들이 들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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