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없이 악한 사람
채원은 20분을 들여 고데기로 머리를 세팅했다.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럽게 화장하고,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향수는 가장 은은한 걸로 딱 두 번만.
“저번에 네가 말한 영화 봤는데…”
정우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방긋 웃으며 열심히 타이핑을 한다.
“누구야? 재밌나봐?”
“응? 아냐아냐. 그냥 게임 친구.”
정우는 여전히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핸드폰만 볼 거야?”
정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핸드폰만 볼거면 나는 왜 만나자고 한거야?”
“미안, 잠깐만.”
이 식당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정우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햄버거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1,2분 정도가 지났을까. 순식간에 햄버거를 해치운 정우는 채원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응시한다.
“뭐해?”
“너는 내가 폰 하는 거 싫어하니까.”
“아, 나 아까 국립현대미술관 갔다왔어.”
“난 현대미술 왜 보는지 모르겠어. 돈 아깝게.”
정우는 한쪽 발을 바깥으로 빼고 까딱거린다. 회색 조거 바지와 양말 없이 신은 슬리퍼.
“아 엄마가 빨리 들어오랬는데.”
“나가고 싶어?”
“아니, 뭐 할 것도 없고. 그리고 내일 휴가 나온 친구 만나러 수원 가야해서.”
“그냥 이렇게 얘기나 하면 안 돼?”
“뭐 할 얘기가 있어? 맨날 똑같은 얘기인데 뭐.”
채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유치원 선생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빨리 먹고 나가자.”
그렇게 둘은 10분만에 가게를 나와 20분정도 함께 걸었다. 가는 길이 갈라지는 이 갈림길. 늘 웃으며 헤어지곤 했던 그 갈림길. 이별 인사를 해야 할 그 타이밍에 채원은 조금 다른 이별 인사를 한다.
“헤어지자, 우리.”
정우는 멍하니 채원을 바라본다. 상상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왜..? 내가 뭐 잘못했어..?”
떨리는 목소리, 눈가엔 눈물이 고여있다.
채원은 알고 있다. 정우는 채원을 사랑한다는 것을. 정우의 행동에는 악의가 없었음을.
그러나 동시에 알고 있다. 채원이 왜 이별을 결심했는지 정우는 영원히 모를 것이라는 사실을. 그걸 설명한들 알아들을 리 없다는 것을. 채원은 정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서서히 멀어져갔다. 흐느끼는 정우의 울음소리를 이어폰으로 틀어막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