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계절

그 무대에서 탈락한 꽃잎 하나

by 꿈을이뤄준은인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곁으로 돌아온 봄을 마주하는 요즘이다. 봄은 가장 따뜻하고 푸르른 계절이지만, 때론 그 따스함이 불씨가 되어, 푸르름이 장작이 되어 마음을 새까맣게 불태운다. 봄은, 가장 아름답고도 아픈 계절이다.


언젠가부터 4월이 되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벚꽃. 한때는 그저 예쁜 꽃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꽃. 벚꽃이 만들어내는 동화 속 환상의 세계 같은, 마치 공주님이 거니는 정원 같은 그 찬란함의 마법. 꽃잎 한 점이 그 애의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 우리 둘의 손이 완전히 포개어졌을 때,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 때. 동화 같은 벚꽃도, 벚꽃을 바라보는 주인공인 우리도 영원할거라 믿었다. 그땐 그랬다.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우리의 이야기도 어느새 끝이 났다. 동화 속 공주님도, 공주님을 사랑하는 왕자님도 더 이상 없다. 단지 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나와 그저 때가 되어 필 뿐인 작은 분홍색 꽃이 남아 있을 뿐. 마음을 간지럽히던 그 꽃이 이제는 마음을 아프게 긁어댄다. 잔인했던 우리의 마지막을, 차가웠던 그때의 너를, 무너졌던 내 모습을 다시 불러온다.


창밖으로 비치는 분홍빛을 외면하려 고개를 떨구고 헤드폰의 볼륨을 두 칸 더 올린다. 귀와 귀에 밀착된 헤드폰, 소리가 가득 채운 그 좁은 틈에는 너도, 나도, 벚꽃도 끼어들 틈이 없으니까. 소리의 벽에 나를 숨기며 느리게 커피잔을 들어올린다. 커피의 향과 동시에 오렌지의 향기가 코 끝을 스친다. 그 애가 쓰던 향수. 선명한 햇살과 그 햇빛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는 오렌지 나무의 달콤씁쓸함. 그 향수만큼이나 달콤하고 따뜻하던 너였는데 왜 우리의 마지막은 비극이어야만 했을까. 너는 아직도 어딘가의 무대에서 그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는 역할을 맡고 있을까.


새콤한 오렌지의 향이 그 향 어딘가에 박제된 지난 시절을 불러온다. 커피잔을 쥔 손 위로 그 아이의 손길이 덧씌워진다. 그 애는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고, 귓가에 날숨을 불어넣는다. 너는 누구일까? 오렌지 향수를 쓰던 너일까? 내게 커피를 알려준 너일까? 아니면 늘 이 카페에서 만나곤 했던 너일까? 내 안에 남아버린 수많은 너, 그리고 그런 네가 겹쳐진 자리에 홀로 서 있는 지금의 나. 나만의 독무대가 되어버린 2인극.


향수에 젖고 싶지 않아서 창문을 열었다. 창가 주변에 자리잡은 싱그러운 커플들 사이 어느새 너와 내가 마주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햇살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우리를 비추고, 나는 공연의 막을 열듯이 천천히,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틈으로 날아온 봄바람 한 줄기에 우리는 벚꽃잎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잔인할 만큼 찬란한 분홍의 세계. 꽃잎은 마치 군무를 하듯 춤을 춘다. 그 무대에서 탈락한 꽃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잠시 공중을 맴돌다 내 손등 위에 내려앉는다.

작가의 이전글삶과 죽음, 그리고 리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