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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Oct 25. 2019

술이 어려울 때 마다 써 볼 술책

김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

   

녹턴사카바에서 아무튼 술을 읽으며 하이볼 몇 잔을 클리어했다.


술. 내 서사에 술이 빠지면 모든 문장에 동사가 사라질 것이다. 언제나 사랑하고 원망하고 경계하는 술.

아무튼 시리즈에 그  '술'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쾌재를 불렀다.

원래 괜찮은 신간이 나왔단 소식을 들으면 설레긴 하지만 이 경우는 급이 다른 설렘이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쓰신 김혼비 작가님의 술책이라니.

나는 다음날 그 책을 사러 갈 때까지, 잠에 들고 일어나고 준비하고 서점에 갈 때까지 들떠있었다.


2019년 5월 21일에 처음 펼치고 8월 10일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너무 재밌고 소중해서 한 장 한 장을 아끼고 싶을 때도 있었고, 못 견디게 술을 불러서 억지로 밀어낼 때도 있었다. 그러는 세 달 동안 술이 너무도 미워져 쳐다보기조차 싫은 때도 있었다. 이 작은 책을 세 달에 걸쳐 읽는 동안에도 나는 여러 편의 술 서사를 쌓아갔다.

그 못 견디게 술을 부르는 때 중 한 번은 참지 못하고 혼술을 하러 나섰다. 하루 종일 가방 안에 아무튼 술을 품고 있다가 일과를 마치고 바에 앉아 책을 펼쳤다. 딱 한 잔만 먹자고 시작한 하이볼을 세잔이나 마시고, 시원한 기린이치방 생맥까지 들이키고 나서야 취기에 잔뜩 업돼서 바를 나설 수 있었다. 술이 주는 감정의 극대화, 약간은 쌀쌀한 날씨가 외로움을 들쑤시고 멈출 수 없게 만들어서 30분정도를 걷고 추스르며 집으로 갔다.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서 혼술을 경계하지만, 꼭 마시고 싶을 때 무명의 술친구를 골라보라 한다면 아무튼 술은 단연코 1위의 자리를 빛낼 것이다. 웬만한 살아 숨 쉬는 술동무들 만큼이나 술맛을 돋우는 능력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함께 술자리를 한 사람이 여럿이다. 한 시기를 지나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가끔씩 만나 술로 함께 둥그스름해지면서 근황을 업데이트하는 친구도 있다. 언제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만나 한잔 두 잔 부담 없이 걸칠 술단짝은 여전히 없다. 그래서 작가님이 T에 대해 얘기할 때 설마 설마 하면서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세상 설마들이 다 그렇듯 기어코 그가 남편이라는 대목이 드러나자 부러움에 괜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술이 먹고 싶은 날에 비해 술동무는 귀했으므로 자주 참거나 찾고 다녔다.

그날도 가볍게 집에서 술 한잔하고 싶은 날이었는데 부산에 있는 친구와 때가 잘 맞아 영상통화를 하면서 맥주를 깠다. 핸드폰 화면으로 서로를 마주하며 맥주를 술술 마셨다. 한 캔이 두 캔이, 그게 서너 캔이 되면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핸드폰 앞에 앉아 맥주 다섯 캔을 비웠다. 그러니까 그 새벽에 맥주만 2500ml를 부어 마신 거다.


'동일 시간 동안 물이라면 절대 마시지 못할 양을 술로는 마실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할 정도였다.'(p.68) 이 문장은 바꿀 말이 없을 정도로 그날에 딱 들어맞았다. 술이 어쩜 그렇게 술술 들어가는지 술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난 기꺼이 그 연구에 자원한 주정뱅이 생체실험자가 되어 맥주를 원 없이 마음껏 먹었다. 그 술은 다음날 러닝 할 때까지 내 뱃속에서 출렁이는 것 만 같았다.                 



이렇게 한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못해 술은 자주 내 자제력을 앗아갔다. 별로 자제할 게 없는 사람이랑 마실 때라든지, 마냥 신나기만 하는 날은 괜찮았지만 가끔 안전핀이 뽑힌 소화기가 되어 방향을 잘못 잡고 실수를 연발했다. 그래서 작가님의 뚜렷한 주사 기준에 맞대보면 내 주사는 무수했다.. 적기 민망할 정도의 밤들이 있었다. 잘 마시다가도 어떤 날은 핀이 나가 주정뱅이가 되었다. 그런 날들이 술을 원망하는 때를 만든다.


술에 흠뻑 취한 날이 그 날로 끝나지 않는 때도 있다. 술은 쾌락이랑 연결돼 있어서 방탕한 향락으로 이어지고, 위험하게도 그렇게 며칠이 쌓이면 나는 일상을 돌보지 않는 망나니가 되었다. 그러고 나면 혼자 어지러운 일상과 그 안에서 돌봄 받지 못한 내 책임 수하의 어떤 것들에게 눈물의 사죄를 하곤 했다. 반성의 일기를 쓰고 다시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도 또 쾌락과 반성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의미 없는 회개일지도 모르겠다. 술은 내게 실패의 지혜를 주지만 그것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평소에 쓸만한 사진이 그렇게 없었는데 술자리 사진은 왜 이렇게 많은지


최근에도 제어하지 못하는 때가 생기는 것이 문득 두려워 거의 한 달간을 금주했다.

그 나름대로 절제의 즐거움이 있는 달이었으나, 술을 다시 먹기 시작하자 어김없이 행복해졌다.

맛있는 술과 어울리는 안주, 어디를 갈까 신중하게 구성해 보는 1차와 2차, 시간이 가고 술병이 자주 기울수록 편하고 느긋해지는 사람들. 몇 병이 쌓이면 들뜨는 마음, 아랑곳 않고 흔드는 몸, 가벼운 발소리와 허물없는 대화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밉고 원망스럽다가도 결국에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내 서사에 술이 빠지면 모든 동사가 사라질 것이다. 여전히 술 먹은 다음날 기억을 통째로 뺏기기도, 이불을 고양이 털 날리도록 빵빵 찰 일도 만들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떼려야 뗄 수 없으니 좋은 관계를 긴장감 있게 유지하며 술과 연애해야 한다.


이 책을 술과 동일시하곤 했다. 술과 묶어서 사랑하고 갈망하다 미워하고 원망했다. 읽는 동안은 자주 웃었고 감탄하고 격하게 공감했다. 나도 술을 저렇게 많이 마시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호쾌하고 술맛 나는 책이다. 내 인생에 술선배를 만든다면 멋대로 김혼비 작가님을 선두로 모실 것이다. 앞으로도 종종 이 유쾌한 지침서를 꺼내놓고 술과 함께 허술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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