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었다가 등 돌린 사람들

인기 강사의 추락

by 꾸더칸

어떤 강사가 추락했다.

표절 논란이 터졌고, 하루아침에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인 건 외부인이 아니었다. 바로 그 강사의 수업을 몇 기수씩 들으며 "팬"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이었다. 울었다, 배신당했다, 믿었는데.. 그런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 강사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수업 안에서 이미 실시간으로 시연을 했었다. 다른 글을 참고해서 새로운 글을 만드는 방식. 학생들은 그 장면을 함께 봤다. 그러니까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았는데 몰랐던 척을 해야 했던 걸까?


나는 이 질문이 흥미롭다. 사람이 어떤 이유로 관계를 맺고, 어떤 순간에 그 관계를 끊는지에 대해. 이 사건은 꽤 많은 걸 드러내준다.


우리는 왜 누군가의 "팬"이 되는가 - 파라소셜 관계의 함정

1956년, 미국의 사회학자 도널드 호튼(Donald Horton)과 리처드 볼(Richard Wohl)은 흥미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파라소셜 관계(Parasocial Relationship)다.

원래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화면 속 인물에게 느끼는 일방적 친밀감을 설명한 개념이었다. 시청자는 진행자에게 친구 같은 감정을 느끼지만, 진행자는 시청자의 존재를 모른다.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계가 아니다.


지금은 이 개념이 훨씬 넓게 적용된다. 유튜버, 인플루언서, 작가, 강사, 우리가 콘텐츠로 만나는 모든 인물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그 사람의 생각을 오래 읽고, 목소리를 듣고,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뇌는 착각을 일으킨다. "나는 이 사람을 알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이 콘텐츠로 내보낸 버전일 뿐이다.

이 착각이 깨질 때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실제로 배신을 당한 게 아닌데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나를 몰랐다는 것, 그 낙차가 상처가 된다.


강의 커뮤니티는 그 구조가 더 복잡하다. 단순한 구독자가 아니라, 돈을 내고 참여하고, 댓글을 달고, 응원을 보내는 관계였으니까. 파라소셜 관계에 투자가 더해진 형태다. 그러니 무너질 때의 낙폭이 더 크다. 감정도 더 크게 요동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고 싶다.


팬이었던 걸까, 혹은 - 후광을 빌린 걸까

이 강의 커뮤니티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한 기수에 삼백 명 가까이 되는 수강생 중 꽤 많은 수가 이미 자신도 수천 혹은 수만 명의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들이었다.


생각해 보자. 수백 명이 모인 공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건, 수백 명에게 내 이름과 글이 노출된다는 뜻이다. 강사의 플랫폼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강사의 팬이 된다는 건 단순한 감정적 애착이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포지션이 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후광 효과(Halo Effect)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에드워드 손다이크(Edward Thorndike)가 1920년에 처음 제안한 개념인데, 어떤 사람이나 브랜드의 한 가지 긍정적 특성이 다른 모든 특성에 대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팔로워 오만 명의 작가와 가까워 보이면, 그 후광이 나에게도 일부 옮겨온다. "저 사람이랑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SNS라는 공간에서 그건 꽤 유효한 신뢰 신호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 사람들이 강사를 정말로 좋아했던 건 맞을 수 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일 수 있다. 진심으로 좋아하면서도, 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민감했던 것. 이걸 위선이라고 부르면 너무 가혹하다. 인간이 관계에서 이득을 계산한다는 건, 나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문제는 그 강사가 무너졌을 때 그 이득이 사라진 것은 물론, 오히려 손해가 됐다는 점이다.


"나는 몰랐다"라고 말해야 했던 이유 - 인지 부조화와 공개적 탈출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1957년 《인지 부조화 이론(A Theory of Cognitive Dissonance)》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이 서로 모순될 때 강한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둘 중 하나를 조정한다.


표절 논란이 터진 순간, 이 강의를 계속 들었던 사람들은 불편한 상황에 놓인다. "나는 표절하는 사람의 강의를 들었고, 심지어 여러 기수를 들었고, 그 방법을 배웠다." 이 사실을 그대로 들고 있으면 자신도 그 도덕적 오염 안에 포함되는 느낌이 든다.


해결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게 뭐 어때, 나는 내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옹호하는 것. 두 번째는 "나는 몰랐다. 나는 속았다. 나는 다르다"라고 스스로를 피해자 포지션에 놓는 것.


두 번째 선택이 훨씬 쉽다. 그리고 SNS라는 공간에서는, 그 선택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공연(Moral Performance)의 메커니즘이다.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공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집단 안에서 신뢰와 지위를 유지하거나 회복하려는 행동. "나는 그 잘못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목소리 높여 선언하는 것이, 조용히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신호를 보낸다.


특히 SNS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즉 자신의 이미지가 곧 자산인 사람들에게 이건 더욱 중요한 선택이다. "나는 그 강사와 달리 정직하게 글을 씁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최적의 타이밍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눈물도, 분노도, 비난도 그것이 완전한 거짓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감정 표현에는 단순한 진심 이상의 사회적 기능이 섞여 있다고 봐야 한다.


강사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무너졌다

강사의 심리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매일 수십 개 이상의 글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 그 압박이 만들어낸 지름길. 양이 많아질수록 질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지고, 지름길은 점점 대담해진다. 조심성이 줄어들면서 결국 들키는 것. 이건 욕심과 시스템의 문제가 동시에 작동한 결과다.


흥미로운 건 그 방식을 수업 안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건 두 가지로 해석된다. 스스로 그 방식이 잘못됐다고 인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미 업계에서 워낙 흔한 방식이라 문제의식 자체가 없었거나.


어느 쪽이든, 이 강사의 추락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결말이었다.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달리는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필연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심리학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파라소셜 관계가 무너질 때의 충격,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한 공개적 탈출, 후광 효과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관계의 속성. 이 프레임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떠난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나는 오히려 남은 사람들에 더 시선이 간다. 전체 수강생의 70%가 환불하고 나간 자리에, 그래도 수십 명이 남았다. 그 사람들은 왜 남았을까?


여기서 쉽게 범하는 실수가 있다. "남은 사람들은 성숙했고, 떠난 사람들은 미성숙했다"는 식의 도식. 하지만 그건 틀렸다. 남은 사람들 안에도 서로 다른 심리가 공존했을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은 처음부터 이 강사에게 도덕적 기준을 크게 요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수업 안에서 강사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지 이미 봐왔고, 그 실용적 방법론에서 가치를 얻었던 사람들. "강사의 인격"과 "강의의 내용"을 처음부터 분리해서 바라봤기에, 표절 논란이 터졌을 때 세계관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수업의 대부분을 들은 상태에서 환불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판단도 함께.


두 번째 유형은 조금 다르다. 강사가 근본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시각. 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인데, 이번엔 실수로 들켰다는 것. 이 유형은 강사에 대한 정서적 충성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잘못이 없다고 믿으니 이탈할 이유도 없다. 이건 성숙함과는 다른 결이다. 오히려 파라소셜 관계가 깊게 작동한 경우에 가깝다. 강사를 보호하고 싶다는 감정이, 사건을 판단하는 시각 자체를 바꿔버린 것.


세 번째 유형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계산한 사람들이다. 수백 명이 있던 자리에 수십 명만 남았다. 이제 이 강사의 눈에 잘 띄는 건 남은 소수다. 추락한 사람은 언젠가 다시 일어서기 마련이고, 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반드시 기억된다. 지금 이 타이밍에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나중에 관계 자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계산.


냉정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판단이다. 주목 경제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에게, 무너진 인플루언서의 회복 서사에 일찍 탑승하는 건 꽤 영리한 포지셔닝일 수 있다.


세 유형 모두 "남았다"는 동일한 행동을 했지만, 그 안에 작동한 심리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어쩌면 한 사람 안에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섞여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울 때, 그 사람 전체를 사는 게 아니다. 강의의 내용과 강사의 인격을 분리할 수 있다면 논란이 터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유형처럼 강사가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믿는 방식은 다르다. 그건 강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선택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조금씩 구부리는 것이다. 그 구부림이 쌓이면, 언젠가 더 크게 무너진다.


결국 이 사건이 드러낸 건 하나다. 어떤 관계든 자기중심이 없으면, 그 관계의 등락이 그대로 나의 등락이 된다. 팬이 됐을 때 함께 올라갔다면, 그 사람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울었다고 잘못된 게 아니다. 떠났다고 잘못된 게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는 정직하기를. "나는 왜 그 관계에 있었나. 나는 거기서 무엇을 원했나." 그 질문을 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다음 관계를 조금 더 내 것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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