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던 아이

by 꾸더칸

모임에 가면 꼭 한 명은 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먼저 말을 건네고, 누가 음료를 다 마셨는지 챙기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슬쩍 말을 걸어 대화에 끌어들인다. 자리를 뜰 때쯤이면 모두가 말한다. "저 사람 참 다정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웃으며 "원래 이래요"라고 답한다.

정말 원래 그런 사람이 있을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향,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감 능력. 분명히 개인차가 있다. 그런데 다정함이 유독 일관되고, 유독 빈틈없고, 유독 피곤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다정함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박수를 받아야 사랑받던 아이

어린 시절의 장면 하나를 상상해 보자.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인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어른들이 박수를 치고 "이야, 잘한다!"고 환호한다.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이는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무언가를 보여줬더니 아버지가 기뻐했다. 아이에게 이것은 발견이다. 아, 이렇게 하면 사랑받는구나.

이것이 한두 번이면 그냥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구조가 반복되면, 아이의 내면에 하나의 등식이 새겨진다.

"무언가를 해야 사랑받는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이것을 '가치의 조건(Conditions of Worth)'이라고 불렀다.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받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동이나 성과를 보여줄 때만 긍정적 반응을 받는 환경. 로저스는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자기 가치를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게 된다고 보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라는 질문의 답이 항상 타인의 반응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아이가 재롱을 부리면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문제는 그 외의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을 때,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무기력하거나 슬플 때, 그때도 같은 따뜻함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학습한다. 가만히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


무대는 바뀌어도 구조는 남는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된다. 더 이상 친척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대신 다른 무대가 생긴다.

직장에서는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나중에 퇴근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뒷정리를 하고, 동료가 힘들어 보이면 먼저 커피를 건넨다. 친구 모임에서는 모두의 일정을 조율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준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것을 선물한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넌 참 따뜻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면 잠깐 안심한다. 아, 나 괜찮은 사람이구나.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한다. 이 사람의 다정함이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챙기는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진심이다. 진짜로 상대를 걱정하고, 진짜로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다.


이 사람은 챙기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시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이 불안하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해야 존재가 확인된다"는 등식 안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다.


위니컷이 말한 '거짓 자기'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참 자기(True Self)'와 '거짓 자기(False Self)'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름이 좀 거칠게 들릴 수 있는데, 여기서 '거짓'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속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자기가 아닌 무언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위니컷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기가 배고파서 울면 엄마가 젖을 물려준다. 아기가 웃으면 엄마도 웃는다. 아기의 자발적인 표현에 양육자가 때맞춰 반응해 줄 때, 아기는 "내가 느끼는 것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감각을 형성한다. 이것이 참 자기의 토대다.

그런데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기가 울어도 반응이 없거나, 아기의 감정이 아니라 양육자의 기분에 아기가 맞춰야 하는 환경이라면. 아이는 자신의 자발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환경이 원하는 모습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거짓 자기다.


위니컷이 특히 주목한 것은 이런 경우다. 아이가 부모의 정서적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 우울한 부모를 밝게 해주는 아이, 불안한 부모를 안심시키는 아이, 부모의 체면을 세워주는 아이. 이 아이들은 겉으로는 일찍 성숙한 것처럼 보인다. "아, 저 아이 참 어른스럽네." 그런데 위니컷의 시선에서 보면, 이것은 조숙함이 아니라 생존이다. 진짜 자기를 숨기고, 환경이 요구하는 자기를 수행함으로써 관계 안에서 자리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거짓 자기를 오래 수행한 사람은, 어느 순간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 된다. "나는 원래 챙기는 사람이야." "나는 원래 남을 먼저 생각해." 이 말이 거짓은 아니다. 오랫동안 수행해 온 것이 실제로 능력이 되고 습관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의 뿌리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선택이 아니라 조건부 생존이다.


수행이 멈추면 일어나는 일

여기서 하나의 장면을 더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아파서 일주일간 누워 있었다. 아무 일도 못 했다. 그동안 당연히 챙기던 사람들을 챙기지 못했다. 업무에서도 평소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몸이 나은 후 그 사람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안도? 아니다. 불안이다.

"내가 없는 동안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나한테 기대하던 것들을 못 해줬는데, 관계가 멀어지지 않았을까." 몸이 아팠던 것은 잊어버리고, 관계의 손실을 먼저 계산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심리학자 레나트 할스텐(Lennart Hallsten)은 '수행 기반 자존감(Performance-Based Self-Esteem)'이라는 개념을 연구했다. 자신의 가치를 성과와 수행으로 확인하는 사람은, 수행이 멈추는 순간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진다. 할스텐은 이것이 번아웃의 핵심 동인 중 하나라고 보았다. 열심히 해서 지치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이 사람을 태우는 것이다.


다정한 사람의 번아웃도 같은 구조다. 누군가를 챙기는 것이 기쁨이면서 동시에 의무인 사람. 쉬고 싶은데 쉬면 불안한 사람. 이 사람에게 "좀 쉬어"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불안의 시작이다. 쉬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니까.


다정함의 형태가 바뀌는 순간

흥미로운 것은, 이 구조를 가진 사람의 다정함이 나이가 들면서 형태를 바꾼다는 점이다.

어릴 때는 노래와 춤이었다. 눈에 보이는 수행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런 직접적인 무대가 사라진다. 대신 다른 형태의 '예쁜 짓'이 나타난다. 선물을 준비하는 것, 먼저 연락하는 것, 상대의 취향을 기억해 두는 것, 모임의 분위기를 관리하는 것.

이 행동들은 성인의 사회적 맥락에서는 '다정함'이나 '배려심'으로 읽힌다. 그래서 더 안 보인다. 어린 시절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누가 봐도 '수행'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의 챙김은 '성격'으로 포장된다. 본인조차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테스트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있어도 괜찮은가."

다정함이 선택인 사람은 괜찮다. 오늘은 챙기고 싶고, 내일은 가만히 있고 싶다. 두 상태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그런데 다정함이 생존인 사람은 괜찮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이 올라온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 불안이 시그널이다.


'조건부 자존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

미국의 심리학자 제니퍼 크로커(Jennifer Crocker)는 '자존감의 수반성(Contingencies of Self-Worth)'이라는 개념을 연구했다. 사람마다 자존감이 걸려 있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어떤 사람은 학업 성취에, 어떤 사람은 타인의 인정에 자존감이 걸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미국의 원래 7가지 요인 중 4가지는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한국에서만 독특하게 '우월성'이라는 요인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경쟁적인 문화 안에서 자존감이 "남보다 나은가"에 걸려 있는 사람이 유독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타인의 인정"에 자존감이 걸려 있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다정함이 바로 그 인정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챙겨주면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잠깐 안심된다. 이 루프가 반복되면, 다정함은 성격이 아니라 자존감 유지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 장치는 깨지기 쉽다. 한 번이라도 챙겼는데 반응이 없으면, 또는 챙기지 않았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면 흔들린다.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존감의 기반 자체가 타인의 반응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멈추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여기까지 읽으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그냥 멈추면 되지 않나. 안 챙기면 되지 않나."

이것이 이 문제의 가장 잔인한 부분이다.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다정함은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해야 보인다"는 등식 안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사랑이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쳐도 챙기고, 아파도 챙기고, 자기감정이 바닥나도 챙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작 자신은 아무에게도 챙김을 받지 못한다. 받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받으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려 하면 "괜찮아, 나는 괜찮아"가 반사적으로 나온다. 괜찮지 않은데도.

받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단순하다. 받는 순간 "내가 약한 사람"이 되니까. 챙기는 사람에서 챙김 받는 사람으로 자리가 바뀌는 것. 그것은 이 사람에게 정체성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 전환이 두렵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심리학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가치의 조건, 거짓 자기, 수행 기반 자존감, 조건부 자기가치. 이 이론들은 왜 다정한 사람이 다정하게 되었는지, 왜 멈추지 못하는지를 꽤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사람의 다정함은 진짜다. 어릴 때 생존을 위해 시작한 것이 맞지만, 지금 이 사람이 누군가를 챙기는 그 마음은 가짜가 아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진심으로 좋아하고, 진심으로 함께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문제는 다정함 자체가 아니라, 다정하지 않은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나. 그냥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나. 그 상태의 나도 괜찮은 사람인가.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느냐가, 다정함이 선택인 사람과 다정함이 생존인 사람을 가르는 경계다.


나는 사람이 본래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살면서 쌓인 부모의 조건, 환경의 기대, 성과로 줄 세우는 세상이 그 원래의 괜찮음을 가린 것이다. 다정한 사람이 자신의 다정함의 뿌리를 보는 순간, 그것은 자기부정이 아니라 자기 발견이다. "아, 내가 이래서 이렇게 살아왔구나." 그 한 문장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발견 이후에 해볼 만한 것이 하나 있다.

오늘 하루, 아무도 챙기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누구의 기분도 살피지 않는 시간. 그 시간에 올라오는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불안이 올라오면, 그 불안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다. "뭔가를 해야 해"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지금의 내 목소리인지,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어린 시절의 목소리인지.


다정함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되는 순간, 비로소 그 다정함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멈춰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전히 여기 있다. 그리고 여전히 괜찮다. 그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날이, 그 사람의 무대가 진짜로 바뀌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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