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은 애도를 막아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투병 기간이 길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6개월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2년을 버텼다. 가족들은 그 2년 동안 매일 병원을 오갔고, 밤마다 간병을 나눠 맡았고, 중간에 상태가 나빠졌다가 다시 나아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마지막 한 달은 말을 못 하셨다. 눈만 겨우 뜨셨다. 그때 딸은 매일 아버지 손을 잡고 앉아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서울에서 더 빨리 내려왔더라면.'
'저번에 아버지가 괜찮다고 했을 때, 왜 그 말을 그냥 믿었을까.'
'6개월이라고 했을 때 더 열심히 곁에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딸은 울었다. 하루 이틀은 울었다. 그런데 셋째 날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슬프다는 감정보다 다른 감정이 먼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슬픔 한가운데에 죄책감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의 애도는 멈췄다.
우리는 슬픔에 대해 오래된 오해를 하나 가지고 있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믿음. 처음에는 아프고, 점점 덜 아프고, 어느 순간 괜찮아진다. 마치 상처가 아물듯이.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1969년에 제시한 애도의 5단계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가 이 오해를 더 강화했다. 이 모델은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착각을 만들었다. 슬픔이 단계를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정상이라는 착각.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마거릿 스트뢰베(Margaret Stroebe)와 헹크 스헛(Henk Schut)은 1999년에 '이중과정모델(Dual Process Model of Bereavement)'을 제시했다. 이 모델이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중요하다. 사별을 겪은 사람은 두 가지 작업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
하나는 '상실 지향(loss-oriented)' 고인을 그리워하고,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슬픔을 직면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회복 지향(restoration-oriented)' 장례 이후의 현실 문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고, 때로는 슬픔에서 잠시 벗어나 쉬는 과정이다.
스트뢰베와 스헛이 핵심적으로 강조한 것은 '진동(oscillation)'이다. 건강한 애도는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오전에는 고인의 사진을 보며 울다가, 오후에는 장 보러 나가는 것. 어느 날은 온종일 그리움에 잠겨 있다가, 다음 날은 청소를 하며 정신없이 보내는 것. 이것이 정상이다. 슬픔에만 머무르는 것도, 일상에만 몰두하는 것도, 어느 한쪽에만 고정되면 애도가 정체된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 슬픔과 일상 사이를 오가는 것. 시간이 걸리지만, 천천히 나아가는 것.
문제는 죄책감이 끼어들 때 시작된다.
죄책감은 애도 과정에서 매우 흔한 감정이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별을 경험한 사람 중 상당수가 크고 작은 죄책감을 경험한다. "더 자주 찾아뵐걸." "마지막에 좋은 말을 해드릴걸." "병원을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죄책감에는 이상한 성질이 있다. 죄책감은 슬픔의 길을 막는다.
슬퍼하려고 하면 죄책감이 끼어든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리워하려고 하면 자책이 올라온다.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반대로 자책에 빠져 있으면 슬픔이 밀려온다. "그래도 보고 싶은데." 두 감정이 서로를 방해한다. 슬픔의 자리에 자책이 앉고, 자책의 자리에 슬픔이 앉는다. 스트뢰베와 스헛이 말한 진동, 상실과 회복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슬픔과 자책 사이를 진동하면서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이 '복합 애도(Complicated Grief)'로 발전하는 경로 중 하나다. 복합 애도는 일반적인 애도 과정을 벗어나 장기간 지속되는 심리적 부적응 상태를 말한다. 슬픔이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고, 일상 기능이 심각하게 저해되며, 고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함께 자신에 대한 비난이 반복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별도의 진단 범주로 분류하며, 핵심 특징 중 하나로 "사망과 관련한 자기 비난"을 꼽는다.
사별 후의 죄책감은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
"내가 더 일찍 내려갔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경우, 아니다. "내가 더 좋은 병원을 알아봤더라면?" 아마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에 좋은 말을 해드렸다면 편히 가셨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안다. 그런데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심리학에서는 죄책감의 기저에 '통제 환상(illusion of control)'이 있다고 본다. 죄책감은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전제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사람에게 중요한 심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었다"는 믿음은 무력감보다 낫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은 무력감이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 그 사람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 이 무력감은 너무 크고 너무 절대적이어서, 마음이 이것을 직면하는 대신 죄책감으로 변환한다. 죄책감은 적어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었다"는 환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죄책감은 무력감보다 견딜 만하다. 내 잘못이라면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죄책감을 놓지 못한다. 죄책감을 놓으면 무력감이 올라오고, 무력감을 직면하면 진짜 슬픔이 올라온다. 그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죄책감이라는 중간 지대에 머무르는 것이다.
죄책감이 엉킨 애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공통적인 패턴이 하나 있다.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일에 몰두한다. 집안일을 쉬지 않고 한다. 운동을 시작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는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벌써 일상으로 돌아왔네, 대단하다." "역시 강한 사람이야." 겉으로 보면 회복한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스트뢰베와 스헛이 말한 '회복 지향'인지, 아니면 '상실 지향'을 피하기 위한 도피인지는 다른 문제다.
건강한 회복 지향은 슬픔을 직면한 후에 잠시 쉬는 것이다. 충분히 울고 나서,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일어나는 것. 그런데 애도를 피하기 위한 바쁨은 다르다. 슬픔을 직면하지 않은 채 일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멈추면 감정이 올라오니까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 다 일하고, 둘 다 사람을 만나고, 둘 다 웃는다. 차이는 밤에 드러난다. 혼자 누웠을 때, 아무 소리도 없을 때, 어둠 속에서 생각이 시작될 때. 그때 올라오는 것이 고인에 대한 따뜻한 기억인지, 아니면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자기 비난인지. 후자라면, 이 사람의 애도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아버지를 간호한 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투병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여러 겹의 감정이 쌓였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충격과 두려움. 그다음에는 희망과 절망의 반복. 상태가 나빠졌다가 나아지고, 다시 나빠지는 동안 가족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결정들이 쌓인다. 어떤 치료를 선택할 것인지, 언제 전원 할 것인지,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이 결정들 하나하나에 죄책감이 달라붙는다.
'그때 수술을 했어야 했나.' '연명 치료를 중단한 건 맞는 선택이었나.' '그냥 집에서 편히 보내드리는 게 나았을까.' '내가 너무 빨리 포기한 건 아닌가.'
반대의 죄책감도 있다. '내가 살려달라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더 고통받으신 건 아닌가.' '차라리 더 빨리 보내드리는 게 아버지를 위한 거였을까.'
이것이 투병 기간이 긴 상실의 특수한 잔인함이다. 결정의 죄책감과 결과의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 무엇을 결정해도 후회가 남는 구조다. 살리려고 해도, 보내려고 해도,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그리고 이 질문이 애도를 잠식한다. 고인을 그리워할 자리에 자기 비난이 들어오고, 자기 비난의 자리에 또다시 그리움이 밀려온다. 슬픔이 직선으로 흐르지 못하고, 죄책감이라는 물길에 자꾸 부딪혀 돌아온다.
사별 후 자책에 빠진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아침에 눈을 뜬다. 잠깐, 고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움이 올라오려는 찰나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가 끼어든다. 그리움은 밀려나고, 자책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 자책이 한참 이어지다가 지쳐서 멈추면, 이번에는 공허함이 온다. 슬프지도 않고, 자책하지도 않는,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 그리고 그 공허함이 불안해서 다시 무언가를 한다. 일을 하거나, 집을 치우거나, 누군가를 만난다.
이 사이클에서 슬픔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자책은 슬픔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다. 슬픔은 "당신이 없어서 아프다"이고, 자책은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다"이다. 슬픔은 고인을 향해 있고, 자책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방향이 다르다. 그런데 사별 후에 이 두 감정이 엉키면, 사람은 슬퍼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실은 자책만 하고 있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주변에서 보면 이 사람은 슬퍼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물도 흘리고, 힘들어하고, 고인 이야기를 꺼내면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사람이 반복하는 문장은 "보고 싶다"가 아니라 "그때 왜 그랬을까"이다. 그리움이 아니라 후회를 곱씹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가 있다. 자책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슬픔에는 바닥이 있다. 충분히 울고 나면 어느 순간 조금 가벼워지는 때가 온다. 그런데 자책에는 바닥이 없다.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를 한 번 시작하면, 그 옆에 또 다른 "이것도 잘못했고", "저것도 잘못했고"가 끝없이 이어진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자책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반복적으로 곱씹는 것이고, 해결될 수 없는 것을 곱씹으면 지칠 뿐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책이 슬픔을 덮고 있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시간이 약이 되려면 그 시간 동안 슬픔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슬픔이 아니라 자책이 흐르고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같은 자리를 맴돈다.
죄책감이 엉킨 애도를 가진 사람에게 자주 보이는 행동이 있다.
고인의 물건을 치우지 못하는 것.
방을 그대로 두거나, 옷을 정리하지 못하거나, 핸드폰 번호를 삭제하지 못하거나. 이것을 주변에서는 "아직 정리가 안 됐나 보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정리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물건을 치우면 그 사람을 잊는 것 같다. 잊으면 안 된다. 잊으면 죄책감이 더 커진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
이것은 죄책감이 애도를 막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다. 물건을 치우는 것이 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상태.
반대로, 물건을 하나 정리할 때마다 슬픔이 올라오고, 그 슬픔을 견딜 수 있게 되고, 다시 하나를 정리하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다. 정리는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마음의 공간으로.
심리학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이중과정모델, 복합 애도, 통제 환상, 죄책감과 무력감의 관계. 이 이론들은 왜 어떤 사람이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죄책감이 애도를 막는 구조에서, 많은 사람이 놓치는 것이 있다. 그 죄책감은 사랑이라는 것. 내가 더 잘하지 못했다는 자기 비난의 밑바닥에는 "그 사람을 진짜로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사실이 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후회도 없다. 관심이 없었다면 죄책감도 없다. 죄책감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와 비례한다.
나는 사람의 감정은 토해내야 낫는다고 생각한다. 안에 가두어두면 곪는다. 그런데 자책이 엉킨 슬픔은 토해내기가 유독 어렵다. 슬프다고 말하려는데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가 먼저 올라오니까. 그리워하려는데 후회가 끼어드니까. 그래서 슬픔을 꺼내는 대신 자책을 꺼내고, 자책을 꺼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결국 아무것도 꺼내지 못한 채 지쳐버린다.
자책과 슬픔은 동시에 존재해도 된다.
후회가 있으면서 그리울 수 있다. 최선이 아니었더라도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자책을 먼저 해결하고 슬퍼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후회를 안은 채로 울어도 된다. 그 두 감정이 뒤섞여 있는 상태 그대로, 꺼내도 된다.
그리고 꺼내고 나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자책이 조금 가벼워져 있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문장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슬픔이 먼저이고, 용서는 그 뒤에 온다. 자신에 대한 용서가.
정리는 서랍이 아니라 서사다. 물건을 치우는 것이 정리가 아니다.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기쁨도, 후회도, 사랑도, 자책도 전부 꺼내어 언어로 만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시 읽어보는 것. 그것이 진짜 정리다. 그리고 그 정리가 끝나면, 비로소 그 사람은 아픈 기억이 아니라 따뜻한 기억이 된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사랑했다. 그러니 이제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