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 이호선 교수의 프로그램에서 한참을 멈췄다.
"자녀를 망치는 파괴적 모성 5가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순간적으로 나와 엄마, 그리고 아들까지 대입하면서 빠져들었다. 충분히 성장기 인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상처를 남길 수 있는 행동이 있었다. 우리 엄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내가 만나온 모든 사람의 불안은 부모의 영향이었다. 사람의 성장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잘못된 양육 태도에 대해, 이호선 교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봤다.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필요에 적절히 반응하면서도 점차 아이가 스스로 세상과 부딪히도록 놓아주는 엄마. 위니컷이 이 개념을 만든 건 역설적으로 '충분히 좋지 못한 엄마'가 아이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아이의 필요 대신 자기 필요에 아이를 맞추게 하면, 아이는 진짜 자기(true self) 대신 엄마가 원하는 모습에 순응하는 가짜 자기(false self)를 발달시킨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8가지 부모 유형은 모두 이 구조를 공유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의 방향이 아이가 아닌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 이호선 교수가 이야기한 5가지에, 내가 상담과 코칭 현장에서 만난 3가지를 더했다.
아이의 피아노 발표회. 아이는 긴장해서 중간에 한 소절을 틀렸다. 연주가 끝나고 아이가 뛰어왔을 때, 이 엄마의 첫마디는 "왜 거기서 틀렸어?"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말이 없다. 다음 날, 아이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온다. 그러면 엄마는 갑자기 활기를 되찾고 인스타그램에 상장 사진을 올린다. 해시태그: #자랑스러운딸 #엄마의보람.
이 엄마에게 아이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이가 잘하면 거울이 예쁘게 빛나고, 못하면 거울이 깨진다. 코헛이라는 심리학자는 이것을 '자기대상(selfobject)'이라고 불렀다. 아이가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부모의 자기가치감을 유지하는 도구가 되는 것.
이 거울 앞에서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묻는다. "지금 나는 괜찮아 보여?" 자기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의 눈에 비친 자기를 확인하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크게 싸우고 울면서 집에 왔다. 이 엄마는 말한다. "그래서?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아이가 계속 울면 "그만 좀 울어. 질질 짜면 뭐가 해결돼?"라고 한다.
이 엄마가 냉혈한은 아니다. 본인도 어린 시절 감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이의 감정 앞에 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불편하다. 그 불편함이 차가움으로 표현될 뿐이다.
심리학자 리히(Leahy)는 이런 환경에서 아이에게 '감정 스키마'가 형성된다고 했다. 감정에 대한 믿음의 틀이 굳어지는 것이다. "슬퍼해봤자 소용없다." "감정을 드러내면 약해 보인다." 이 틀 안에서는 괜찮은데, 틀 밖의 상황, 예컨대 연인이 "오늘 기분이 어때?"라고 물을 때에는 완전히 얼어붙는다. 대답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없으니까.
퇴근하고 돌아오는 엄마의 발소리. 아이는 현관문이 열리기 전에 이미 온몸이 긴장한다. 문이 거칠게 열리면 오늘은 피해야 한다. 조용히 열리면 괜찮은 날이다. 어떤 날은 엄마가 웃으면서 치킨을 사온다. 어떤 날은 같은 엄마가 설거지통에 그릇이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패턴을 읽으려 한다. 엄마의 표정, 말투, 걸음걸이, 문을 닫는 세기. 이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한 데이터가 된다. 에인스워스의 애착 이론에서 이런 환경의 아이는 '불안-양가 애착'을 형성한다. 엄마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갔다가 폭발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이중적 긴장.
이 아이는 커서 눈치의 천재가 된다. 회의실에서 상사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0.1초 만에 읽는다. 연인의 카톡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심장이 뛴다. 유능해 보이지만, 그 유능함의 뿌리가 공포라는 것을 본인만 안다.
중학생 아들이 학교 캠프에 가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말한다. "너 거기 가면 밤에 춥잖아. 너 원래 기관지 약하잖아.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빠지게 해줄게." 아이가 "괜찮아, 가고 싶어"라고 하면 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네가 몰라서 그래. 작년에 감기 걸려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건 뮌하우젠 증후군(현재 정식 명칭은 '타인에게 부과된 허위성 장애')의 약한 스펙트럼이다. 심한 경우에는 실제로 아이에게 병을 만들어내지만, 일상적인 수준에서는 "너는 약한 사람이야"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엄마의 목적은 아이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돌봄 제공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해."
이 구조에서 자란 아이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중요한 선택 앞에서 늘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린다. 직장을 옮길 때도, 연애를 시작할 때도. "내가 이걸 해도 되나?"를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움직일 수 있다.
고등학생 딸이 대학은 서울로 가겠다고 말한다. 엄마의 눈에 물기가 고인다. "그래, 가. 엄마는 괜찮아." 그리고 며칠 동안 한숨만 쉰다. 밥을 차려놓고 "엄마는 입맛이 없어서"라며 먹지 않는다. 일주일쯤 지나면 아이가 먼저 말한다. "그냥 여기 근처 대학 갈게."
이 엄마는 한 번도 "가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통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과 한숨과 눈물로 아이의 선택지를 좁혔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정서적 협박(emotional blackmail)'이라 부른다.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죄책감을 자극해 행동을 바꾸게 하는 것.
"엄마 인생은 너 하나 잘되라고 있는 거야." 이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심리적 부채를 진다. 엄마에게 빚을 졌으니까, 갚아야 한다. 자기 인생을 살면 빚을 저버리는 것 같고, 엄마 곁에 있으면 빚을 갚는 것 같다. 이 구조 안에서 분리-개별화, 심리학자 말러가 말한, 아이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정상적 발달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역할이 뒤집힌다. 아이가 엄마를 돌보고, 엄마의 기분을 관리하고, 엄마의 매니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효도'라고 부른다.
기말고사에서 전교 5등을 했다. 성적표를 보여주는 아이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하다. 엄마가 말한다. "5등? 수학은 왜 이것밖에 안 돼? 3등 한 애는 수학 만점이라던데."
이 엄마는 거울형과 다르다. 거울형 부모는 남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지만, 채점표형 부모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자기 안에 있는 기준표가 문제다. 그 기준은 끝이 없다. 100점을 맞아도 "실수 없이 맞은 거야?"를 묻는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이것을 '조건부 긍정적 존중(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라 불렀다. 아이가 특정 조건을 충족했을 때만 사랑과 인정을 주는 것. 아이는 학습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충분하지 않다." 이 믿음은 성인이 되어 완벽주의로 변한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끝내도 만족하지 못한다. 칭찬을 받아도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것이 죄책감이다. 멈추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으니까.
명절 모임. 엄마가 친척들 앞에서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아들이 요즘 회사를 그만두고 뭘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젊으니까 해보라고 했죠 뭐, 다 경험이니까~" 주변 사람들은 "엄마가 열린 분이시네요"라고 한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들이 "오늘 이모네 음식 맛있었다"고 말을 걸어도 짧게 "응"만 한다. 집에 도착해서 엄마는 거실에 앉아 TV를 켜지도 않고 한숨을 쉰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가 뭘."이라고 한다. 그 목소리에 실린 무게를 아들은 정확히 느낀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며칠 뒤 이모한테 전화가 온다. "너 엄마가 요즘 속상해하시던데, 좀 잘해드려."
이 엄마의 특징은 바깥에서와 안에서가 다르다는 것이다. 바깥에서는 이해심 많은 엄마이고, 안에서는 침묵과 한숨과 분위기로 벌을 주는 엄마다. 직접적인 비난은 하지 않는다. 대신 제3자를 통해, 혹은 공기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된다. 아이가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엄마가 뭘 어쨌다고?"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로 무마된다.
심리학자 맥브라이드는 이 유형을 '은밀한 잔인형(secretly mean)'이라 불렀다.
이 구조가 파괴적인 이유는, 아이가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명히 상처받았는데, 상처받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걸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아이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내가 이상한 거구나. 나는 너무 예민한 사람이구나."
이것이 가스라이팅의 구조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감정을 신뢰하지 못한다. 화가 나도 "내가 화낼 일인가?"를 먼저 묻고, 슬퍼도 "이 정도로 슬퍼해도 되나?"를 먼저 계산한다.
딸이 고등학교 1학년이다. 학교에서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겼다. 일기장에 쓰는 대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친구 같았으니까. 그런데 주말에 엄마 친구들이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웃으면서 말한다. "얘가 요즘 남자친구가 생겼대요~ 사진 보여줘, 엄마 친구들한테." 딸이 당황해서 "엄마!" 하면 "뭘~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이 엄마는 나쁜 의도가 없다. 진짜로 딸과 친구 같은 관계라고 믿는다. 딸의 연애도, 고민도, 친구 관계도 다 알고 싶어 한다. 딸이 전화를 안 받으면 불안해하고, 딸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서운해한다. "엄마는 빼고?"
가족치료의 창시자 미누친은 이것을 '밀착(enmeshment)'이라 불렀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심리적 경계가 사라진 상태. 서로의 영역에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가는 구조. 위니컷은 건강한 발달을 위해서는 아이가 점차 엄마와 분리된 존재라는 인식을 형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만의 영역 (비밀, 사생활, 엄마가 모르는 세계) 이 필요하다.
친구 같은 부모. 많은 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와 친구는 역할이 다르다. 친구에게는 경계가 없어도 괜찮지만, 부모에게 경계가 없으면 아이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아이는, 나중에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같은 것을 기대하거나 같은 것을 요구받는다. 혹은 반대로,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된다. 한 번도 자기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을 지키는 방법도 모른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 엄마가 이랬는데"라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이러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감정이다.
나는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오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엄마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부모가 될 사람이다. 내가 상처받은 그 방식이 놀랍게도 내가 사랑하는 방식에 스며들어 있을 수 있다. 엄마가 나를 채점했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아이의 성적표를 먼저 펼치고 있을 수 있다. 엄마가 감정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가 울 때 "그만 울어"가 먼저 나올 수 있다. 엄마가 "다 너를 위해서"라고 했던 것처럼,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위니컷은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표현을 쓰면서 일부러 '완벽한 엄마'라는 말을 피했다. 완벽한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아이가 세상에서 적당히 좌절하고, 적당히 실망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려면 엄마가 완벽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이호선 교수가 말한 이것 하나만 기억했으면 한다.
내가 아이에게 하는 이 말, 이 행동이 “아이를 편하게 하는가, 나를 편하게 하는가.”
이 질문 하나를 가슴에 얹어두는 것 만으로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의 엄마와 당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녀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도 한마디를 하고 싶다.
당신의 엄마도 누군가의 아이였다. 엄마의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의 엄마가 있었다. 상처는 한 세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물려 내려온 것이다. 엄마를 이해하라는 뜻이 아니다. 용서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엄마의 사랑이 서툴렀던 이유에도 서사가 있다는 것. 그 서사를 알면, 내가 받은 상처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리는 서랍이 아니라 서사다. 엄마의 사랑 방식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정리다. "아, 우리 엄마가 이랬구나"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상처는 더 이상 이유 모를 통증이 아니게 된다. 원인을 아는 아픔은, 모르는 아픔보다 훨씬 다루기 쉽다.
엄마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자녀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대물림은 거기서 멈출 수 있다.
당신이 멈추면, 당신의 아이는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