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집안 사정이 복잡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바빴다. 그 사이에서 아이는 할머니에게 기댔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있으면 세상이 조용해졌다. 무서운 일이 있으면 할머니한테 달려가면 됐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안아줬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됐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나이가 좀 많았다. 듬직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괜찮았다. 무슨 결정을 해야 할 때 남편한테 물어보면 됐고, 불안할 때 남편이 옆에 있으면 가라앉았다. 주변에서는 "잘 맞는 부부"라고 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은 육아에 서툴렀다. 도움이 필요할 때 옆에 있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 사람은 혼자 일과 육아를 감당하면서, 어느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불안.
명확한 이유가 없는 불안. 남편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아이도 건강하고, 일도 잘 되고 있는데 — 그런데 어딘가 바닥이 빠진 것 같은 느낌. 발을 디딜 곳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볼비(John Bowlby)는 '안전기지(secure bas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원래는 아이와 양육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탐험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아기는 아무 데나 가지 않는다. 엄마에게서 조금 떨어졌다가, 돌아와서 확인하고, 다시 조금 더 멀리 가본다. 무서운 일이 생기면 바로 엄마에게 달려온다. 엄마가 거기 있으면 안심하고, 다시 나간다.
볼비는 이 구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기에게 양육자는 세상을 탐험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위험할 때 돌아올 수 있는 기지다. 안전기지가 있어야 아이는 바깥세상을 두려움 없이 탐색할 수 있다. 안전기지가 불안정하면, 즉 엄마가 예측 불가능하게 반응하거나, 아예 없으면 아이는 탐험 자체를 포기하거나, 반대로 불안한 상태에서 과도하게 매달리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 심리학자 신디 하잔(Cindy Hazan)과 필립 쉐이버(Philip Shaver)는 애착 이론을 성인 관계로 확장했다. 어른도 안전기지를 필요로 한다. 다만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아이에게 안전기지가 부모였다면, 어른에게 안전기지는 배우자, 절친한 친구, 가족, 때로는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다. 힘들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 아무 말 안 해도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이 견딜 만해지는 사람.
문제는 이 안전기지가 한 사람에게만 걸려 있을 때 시작된다.
앞서 이야기한 그 사람의 삶을 다시 보자.
할머니가 안전기지였다. 할머니 곁에 있으면 괜찮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할머니에게 기대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안전기지가 이동한다. 남편에게로.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애착 전이(attachment transfer)'라고 부른다. 볼비는 애착 대상이 위계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이 있고, 아래로 갈수록 덜 핵심적인 관계들이 배치된다. 삶의 단계가 바뀌면서 이 피라미드의 구성이 변한다. 부모가 꼭대기에 있다가, 연인이 올라오고, 결혼 후에는 배우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문제는 이 이동이 자연스러운 분산이 아니라, 통째로 옮겨가는 것일 때다.
할머니라는 안전기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남편이 차지한다. 남편 하나에 안전기지의 전부가 걸린다. 이 구조는 남편이 안정적으로 기능할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남편이 흔들리면, 예를 들어 육아로 지쳐서 수동적이 되거나, 감정적으로 부재하거나, 바빠서 곁에 없거나 하면, 안전기지 전체가 흔들린다.
한 사람에게 모든 정서적 무게를 건 것이다. 그 사람이 흔들리면, 바닥이 빠진다.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그 사람의 "이유 없는 불안"의 정체다. 남편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남편이 변한 것도 아니다. 안전기지의 구조가 너무 취약한 것이다. 기둥이 하나뿐인 건물은, 그 기둥에 조금만 금이 가도 전체가 위험해진다.
안전기지가 한 사람에게 걸려 있는 사람에게, 그 관계가 흔들리는 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존재적 불안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한다. 때로는 매우 전략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읽고, 소통 기법을 배우고,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연구한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같은 책이 인생책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 계발 취향이 아닐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관계의 법칙"을 배워서 통제감을 확보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어릴 때 안전기지가 불안정했던 사람 (부모의 반응이 예측 불가능했거나, 사랑이 조건부였거나, 정서적으로 홀로였던 사람)은 관계에서 안전감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볼비가 말한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이 "사람은 믿을 수 없다"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팅을 가진 사람이 그래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찾는 것이 기술이다. 기술은 예측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반응한다"는 공식이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관계를 기술로 관리하는 것이 성공할수록, 그 관계는 점점 더 기술에 의존하게 된다. 기술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이 줄어든다. 그리고 기술이 안 통하는 순간이 오면 (상대가 예측 밖의 반응을 보이면) 무너진다. 기술이 아니라 관계를 믿어야 하는 순간에, 관계를 믿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리학의 최근 흐름을 하나 더 살펴보자.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칸(Robert Kahn)과 토니 안토누치(Toni Antonucci)는 '호위대 모델(Convoy Model of Social Relation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람의 사회적 지지 체계를 동심원으로 그린 것이다.
가장 안쪽 원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배우자, 부모, 절친한 친구. 이 사람들은 깊고 지속적인 정서적 지지를 제공한다. 그 바깥 원에는 조금 덜 가깝지만 여전히 중요한 관계들이 있다. 동료, 이웃,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바깥 원에는 느슨하지만 필요할 때 연결될 수 있는 관계들이 있다. 커뮤니티, 동호회, 신뢰할 수 있는 기관.
칸과 안토누치가 강조한 것은 이 호위대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고, 관계의 위치가 이동한다. 그런데 핵심은 건강한 상태에서는 이 동심원의 여러 층위에 사람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빠져도 다른 사람이 있다. 한 관계가 흔들려도 전체 구조는 유지된다.
문제는 이 동심원의 가장 안쪽에 사람이 한 명뿐일 때다.
배우자 하나에게 모든 정서적 기능을 맡기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아프거나, 지치거나, 바쁘거나, 감정적으로 부재할 때 전체 지지 체계가 무너진다. 칸과 안토누치의 모델에서 이것은 호위대가 편성되지 않은 상태다. 전쟁터에 호위병 한 명만 데리고 나가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마리오 미쿨린서(Mario Mikulincer)와 필립 쉐이버(Philip Shaver)는 2023년에 애착 이론을 더 확장했다. 이들은 안전기지가 반드시 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배우자, 친구, 가족, 반려동물, 신뢰할 수 있는 집단, 심지어 치료적 관계까지 여러 원천에서 안전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안전기지 네트워크'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관계가 겹겹이 안전망을 형성하는 구조.
볼비 본인도 후기 저작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모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이 애착 대상들이 제공하는 안전기지로부터의 크고 작은 탐험의 연속으로 조직될 때 가장 행복하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들. 복수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안전기지를 여러 사람에게 분산하면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지 못할까.
답은 간단하지만 슬프다. 기대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충분히 기대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러 사람에게 기댈 수 있다. 기대면 받아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볼비가 말한 내적 작동 모델이 "사람에게 기대면 괜찮다"로 세팅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릴 때 기댈 곳이 한 곳뿐이었거나, 기대었는데 받아주지 않는 경험이 반복되었거나, 기대는 것 자체가 약한 것으로 여겨지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대는 것이 어렵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대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한 사람을 발견하면 (할머니, 배우자, 오래된 친구)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건다. 여러 사람에게 나누는 법을 모르니까. 그리고 그 한 사람이 흔들리면, 전부가 흔들린다.
이 패턴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다음 안전기지를 찾는 것이다. 떠난 사람 대신 기댈 수 있는 또 한 사람을 찾는 것. 이것은 즉각적인 안도를 주지만, 구조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기둥이 하나인 건물을 허물고, 기둥이 하나인 다른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기둥을 늘리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전부를 걸지 않는 것. 친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작은 기댐을 여러 곳에 시도하면서, "기대도 된다"는 감각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도 보인다.
기댈 사람이 여러 명 있으려면, 그 관계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는 진공 속에서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아이를 함께 돌봐줄 수 있는 이웃.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커뮤니티.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지원.
혼자 일과 육아와 살림을 감당하면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자책하는 사람을 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 기댈 곳이 물리적으로 없는 것이다. 남편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격이 아니라 환경일 수 있다.
에인스워스가 우간다에서 관찰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은 엄마 한 사람이 아니라 4~6명의 양육자에게 동시에 애착을 형성했다. 삼촌, 이모, 할머니, 이웃이 양육을 나눴다. 아이의 안전기지가 처음부터 여러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도움을 많이 받는다"가 아니라, 아이의 내적 작동 모델 자체가 "여러 사람에게 기대도 된다"로 형성된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구조가 약해졌다. 핵가족화, 1인 가구 증가, 지역 공동체의 해체. 결과적으로 정서적 무게가 배우자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개인의 애착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심리학은 여기까지 설명해 준다. 안전기지, 애착 전이, 호위대 모델, 안전기지 네트워크. 왜 한 사람에게 기대면 위험한지, 왜 여러 관계가 필요한지를 이론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고 싶다.
"안전기지를 내 안에 만들라"는 말을 듣는다. 자기 안에 단단한 중심을 세우면, 누가 흔들려도 괜찮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게 절반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서는 안정될 수 없다. 볼비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안전기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안정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무리 내면이 단단해도, 전화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밤 3시에 불안이 올라오면 그 단단함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온다.
진짜 필요한 것은 내 안의 단단함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실제로 기대어본 경험에서만 온다. 이론이나 결심으로는 안 된다. 실제로 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받아줬던 경험. 도움을 요청했는데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그 경험이 하나씩 쌓이면서, "기대도 된다"는 내적 작동 모델이 천천히 수정된다.
나는 사람이 본래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는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배고프면 울었고, 무서우면 달려갔고, 안기면 안심했다. 그런데 살면서 받아주지 않는 환경, 기대면 실망하는 경험, 혼자 해내야 했던 시간들이 쌓이며 기대는 법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안전기지를 되찾는 과정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을 다시 꺼내는 것이다. 기대도 된다는 감각. 여러 사람에게 기대어도 괜찮다는 감각. 한 사람에게 전부를 걸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오늘 친구에게 "요즘 좀 힘들어"라고 한마디 하는 것. 가족에게 "도와줄 수 있어?"라고 물어보는 것. 그 한마디가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 한마디가 가장 용감한 첫걸음이다.
기둥이 하나인 건물은 위태롭다.
기둥을 늘리는 것. 그것이 진짜 안전기지를 만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