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이 불편한 사람들은 겸손한 걸까

-누가 그린 그림인가

by 꾸더칸

"오늘 입은 옷 너무 잘 어울려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고마워요" 하고 짧게 웃는다.

어떤 사람은 "아, 이거 그냥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은 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또 어떤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넘기는 것 같다가,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진심이었을까. 그냥 인사치레 아니었을까. 내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우습잖아.”


칭찬은 분명 좋은 말이다. 누가 봐도 그렇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칭찬은 가시처럼 박힌다. 받는 순간 어색하고, 받고 나서도 자꾸 곱씹게 된다. 결국에는 그 칭찬을 머릿속에서 깎아내리고, 줄이고, 부정하면서 "그 정도는 아닌데"로 결론을 내린다.

왜 이러는 걸까. 자존감이 낮아서? 겸손해서?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가 있다.


칭찬을 거절하는 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스완(William Swann)은 1983년에 흥미로운 이론 하나를 내놓았다. 자기검증 이론(Self-Verification Theory)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말을 듣고 싶어한다.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칭찬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스완은 이 상식에 의문을 던졌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단순히 "기분 좋은 말"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일치하는 말을 원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내가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당신 정말 멋져요"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이 말은 분명 좋은 말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자기 이미지와는 부딪힌다. 이때 내 안에서는 작은 균열이 생긴다. 저 사람이 나를 잘못 본 건가? 내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나? 둘 중 하나는 틀렸다.

이 균열을 빨리 봉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뭘까. 칭찬을 거절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세상은 다시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고, 저 사람의 말은 그냥 인사치레였고, 모든 것이 제자리다.


스완의 후속 연구는 이 흐름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울 성향이 있는 대학생들은 또래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내려는 경향을 보였고, 부정적 자기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부정적 피드백을 주는 룸메이트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깎아내리는 환경 속에 더 깊숙이 들어간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있어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칭찬을 못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런 것이다. 그 칭찬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는 누구지? 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 차라리 칭찬 쪽을 의심해 버린다.


어렸을 때, 칭찬에는 늘 조건이 있었다

스완이 "왜 거절하는가"를 설명했다면, 그다음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그런 자기 이미지가 만들어졌는가"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이 칼 로저스(Carl Rogers)다.


로저스는 인간 중심 상담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평생 붙들고 있던 개념 중 하나가 조건부 긍정적 존중(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다. 풀어쓰면 "조건이 붙은 사랑"이라는 뜻이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 속에서 자란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게 어렵다. 아이가 1등을 했을 때, 말을 잘 들었을 때, 떼를 쓰지 않았을 때, 동생을 잘 돌봤을 때, 이런 순간에만 환하게 웃어준다. 반대로 성적이 떨어지거나, 짜증을 내거나, 부모를 곤란하게 했을 때는 차갑게 식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 로저스에 따르면 아이는 "나는 ~할 때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내면의 공식을 학습한다. 이것을 그는 "조건부 가치(conditions of worth)"라고 불렀다. 사랑이 공기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는 시험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이 공식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교해진다. 누군가 "옷 잘 어울려요"라고 말하면, 아이 시절에 만들어진 검열관이 즉시 작동한다. 내가 진짜 잘 어울려서 그런가? 아닌데. 나는 이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리고 자격을 통과하지 못한 칭찬은 자동으로 반려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를 너무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어렸을 때 익힌 "자격 없이 받으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칭찬을 거절하는 그들의 말투에는 어떤 결연함마저 있다. 나는 나를 함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평생 자기와 맺어온 약속이다.


칭찬을 깎아내리는 세 가지 자동 반응

칭찬을 못 받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어 기제는 대략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출처 의심하기다. "저 사람이 진심으로 한 말일까? 뭔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칭찬을 받자마자 그 칭찬의 동기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분석이 끝나면 결론은 거의 정해져 있다. 진심이 아닐 거야.


두 번째는 대상 축소하기다. "이 옷이 잘 어울리는 거지, 내가 잘 어울리는 건 아니야." 칭찬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켜나게 만든다. 옷, 조명, 화장, 운, 그날의 컨디션, 칭찬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다 외부 요인이다. 나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다.


세 번째는 미래로 미루기다. "지금은 운 좋게 잘 보였을 뿐이지, 다음에는 들통날 거야." 이 반응은 가면증후군(impostor syndrome)과 깊이 닮아 있다. 현재의 인정을 미래의 폭로로 전치(轉置)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칭찬이 클수록, 미래의 폭로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큰 칭찬일수록 더 무겁고 더 두렵다.


이 세 반응은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의식적으로 "거절해야지" 결심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 칭찬을 던지는 순간, 마음 어딘가에서 자동 분류기가 작동한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내 자기 이미지가 흔들린다. 흔들리면 위험하다. 그러니 받아들이지 말자. 이 모든 판단이 1초 안에 끝나고, 입에서는 "에이, 아니에요"가 나온다.


그래서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을까

여기까지 읽으면 자연스러운 결론이 떠오른다. 그렇구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칭찬을 잘 받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칭찬을 못 받는구나.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자존감이 낮아서 칭찬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이미지가 부정적인 쪽으로 굳어져 있어서 못 받는 것이다. 둘은 미묘하게 다르다.


자존감은 변동성이 있는 감정에 가깝다. 좋은 일이 있으면 올라가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내려간다. 반면 자기 이미지는 훨씬 더 단단하고, 잘 변하지 않는 신념의 구조물이다. 어렸을 때부터 쌓아 올려진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명제들의 집합이다.

이 구조물이 단단할수록,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사람은 그 구조물을 지키려 한다. 부정적 자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칭찬을 거절하면서 그 구조물을 지키고, 긍정적 자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비난을 흘려보내면서 그 구조물을 지킨다. 양쪽 다 같은 메커니즘이다. 다만 지키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칭찬을 잘 받자"는 캠페인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칭찬을 받지 못하는 게 표면의 행동 문제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자기 이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행동만 고치려고 하면 며칠은 가지만, 곧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구조물 자체에 손을 대지 않고는 표면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그 자기 이미지는 누가 그린 그림인가

여기까지가 심리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기검증 이론과 조건부 존중. 둘 다 정확한 설명이고,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이 두 이론에는 공통적으로 빠져 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자기검증 이론은 우리가 "자기이미지와 일치하는 피드백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조건부 존중은 그 자기이미지가 "어린 시절 부모의 조건부 사랑에서 학습된다"고 말한다. 둘 다 메커니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 자기이미지를 두고,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루지 않는다.


그 자기이미지는 누가 그린 그림인가.

자기이미지는 자기가 자기를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당연히 "내가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명제, 이건 누가 처음 한 말일까. 정말 내가 내린 결론일까, 아니면 누군가 나에게 한 말이 어느 순간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목소리처럼 들리게 된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 후자다. 부모의 한숨, 선생님의 비교, 친구의 농담, 연인의 헤어지면서 한 말. 이런 외부의 평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안에서 1인칭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부족하다고 생각해"였던 것이, 어느 순간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가 된다. 화자가 슬쩍 바뀐 것이다. 그리고 화자가 바뀌는 순간, 그 명제는 외부의 평가에서 내적 진실로 격상된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사실처럼 느껴진다.


칭찬을 거절하는 행동은 이 격상된 명제를 지키는 일이다. 누군가 "당신 멋져요"라고 말하면, 내 안에 자리 잡은 그 명제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와 충돌이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익숙한 명제 쪽을 지킨다. 마치 그 명제가 내 것인 것처럼. 그런데 정말 내 것일까.


그래서 진짜 점검이 필요한 건 칭찬을 받는 기술이 아니다. 그 자기이미지의 저작권자를 추적하는 일이다. 다음 같은 질문들이 그 추적의 시작이다.


이 자기이미지는 누가 처음 나에게 씌운 것인가. 부모인가, 형제인가, 어떤 선생님인가, 첫사랑이었던 사람인가. 어떤 장면, 어떤 말 한마디, 어떤 분위기였는가.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자기이미지는 더 이상 "내적 진실"이 아니라 "외부에서 도입된 명제"가 된다. 출처가 보이는 순간, 격상되었던 명제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내려온다.


그 사람은 나를 정확히 본 사람인가. 그가 나에게 그 평가를 내렸을 때, 그는 어떤 상태였는가.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자기 좌절을 나에게 투사하고 있었는가. 그가 본 것은 정말 나였는가, 아니면 그의 두려움이나 기대였는가. 많은 경우, 우리에게 강력한 자기이미지를 남긴 사람은 우리를 정확히 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통과시켜 우리를 본 사람이다.


그 자기이미지는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만들어진 시점은 보통 10대, 20대 초반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그때의 환경과 지금의 환경은 같은가. 그때의 관계와 지금의 관계는 같은가. 거의 모든 답이 "아니오"인데도, 그때 만들어진 자기이미지는 지금까지 1인칭으로 유지되고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하면, 무언가가 풀려나간다. 평생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언해 온 명제가, 사실은 "누군가 나를 이렇게 봤다"는 명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진술이다. 전자는 정체성이고, 후자는 한 사람의 관점이다.


그러면 그다음 질문이 가능해진다. 나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쥐어준 붓이 아니라, 내가 직접 쥔 붓으로 나를 그린다면. 그 그림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점이 단단하고, 어떤 점이 유연하고, 어떤 점이 아직 진행 중인가. 이 그림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평생을 통해 천천히 그려지고, 수없이 덧칠되고, 때로는 지워지고 다시 그려진다. 그게 자기를 자기가 그리는 일의 본질이다.

칭찬을 받는다는 건 이 새로운 그림에 다른 사람이 더해주는 한 줄의 색이다. 그 색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붓을 쥐고 있는 나다. 평생 누군가 그려준 그림을 자기 모습이라고 믿어왔다면, 이제는 그 그림에 서명을 다시 보는 일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거기에 적힌 이름이 정말 내 이름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