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정은 내가 사는 곳이다.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의, 가마솥 부釜, 뫼 산山, 부산에서 나고자란 나는, 구름 운雲, 우물 정井, 운정이라는 곳에 와서 산다. 부산에서 자란 곳은 풀 초草, 고을 읍 邑, 초읍이란 곳이었다. 여기까지 읽고 뭉게구름과 저 푸른 초원을 떠올리며, 혹시 내가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인생'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대답은 '아닙니다.'이다. 분명히해두지만 나는 도시가 좋다.
범위를 좁히면 들 야野, 못 당塘, 야당이란 곳인데, 실제 농사를 짓기 위한 연못 같은 곳이 있었다고 한다. 범위를 넓히면 여기는 파주坡州다. 최근까지 한국사람의 기억에 파주는 군사지역이었다. 파주, 연천 어디 어디서 군생활을 했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신도시가 들어선 지금도, 주거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군부대가 나오고, 군인들이 가까운 유흥지역으로 여겨, 외박과 휴가를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거주 자체로만을 목적으로 본다면 파주 운정 야당은 매우 좋은 곳이다. 학교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산책로가 있고, 스타벅스와 이마트가 있고, 야당역도 있다. 소위 있을 것이 다 있어 불편함이 없다.
설날이라 찾은 본가는, 현재 부산을 떠나 양산'신도시'에 자리 잡았다. 내가 사는 곳도 운정'신도시'라고 불린다. 이 신도시라는 것이 새로울 신新이 들어가기에 느낌적으로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그리고 실제 새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차 쾌적하고 깨끗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적인 비주류성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 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거라는 본질 외에 부동산이라는 가치를 더 따지기 때문인데, 거기에 열성과 우성이 존재하고, 말하자면 신도시는 열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당 밑에 사시는 분들이 발끈하실 수 있는데, 그런 반응도 '상대적'의 좋은 예가 될 것 같다.)도시에는 원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당연히 있다. 그런데 항상 보기에 좋지 않다거나, 저평가되어 있다거나 뭐 그런 이유로 재개발을 하려는 무리들이 등장하고, 그 지역 원주민들은 보상금과 실입주금 사이의 만길 낭떠러지 같은 격차를 마주하고, 허우적대다가 도시 변두리나 위성도시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본가로 가는 길은 약 420km, 남한의 북서 쪽 끝과 남동 쪽 끝을 잇는 여정이다. 오십여 년 인생의 절반을 고향을 떠나 살았다. 그중에 또 6년은 베트남에서 살았으니, 이제는 고향과 객지와 삶의 터전, 이런 말들에 별 감흥이 없다. 책에서나 읽고, 노래 가사에나 나오는 옛날의 놀던 고향, 그리운 그곳,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오래된 집 같은 것들은 내 현실 속에 없다.
서울에서 일하고 파주에서 살고, 하는 일들이 사회적 경제적 개념과 연관되어 심사만 복잡할 뿐, 좀처럼 안정을 주지 못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삶과 신분의 척도로 사용되는 아파트에 있어서도, 나의 상황은 거주와 행복을 연결 짓기에는 충분함이 없어 보인다.
20여 년 전 서울 간다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왔을 때, 그 젊은 시절에 많은 생각을 했고, 꿈을 꿨었더랬다. 결국 접고, 접고, 접어서 겨우 여기까지 온 것인데, 아주 단순한 서울 간다는 호언장담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나와 함께 운정신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왔을까?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꿈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죽기 전에 그 옛날 서울 간다는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나이 오십에 아직 수많은 물음표만 남았다. 설날고속도로 위에서 8시간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