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멧별 Dec 15. 2024

원룸 가족

초록 물고기는 어디에

1997년 2월 한국 조폭 영화의 거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은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초록 물고기'다. 한석규가 연기한 주인공 막둥이는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다. 막둥이 가족은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던 시절 훨씬 전부터 그 언저리에 살았지만, 토지 보상이나 신도시의 열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군대를 막 제대한 막둥이는 경의선 열차 안에서 여자 문제로 시비가 붙고 그 인연으로 문제가 된 여자와 엮이게 된다. 그 여자는 밤무대 가수 미애로 심혜진이 열연했다. 미애는 조직폭력배 배태곤이 지배하는 여자다. 소용돌이치는 관계와 사건 속에서 막둥이와 미애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기차 여행을 좋아하는 미애를 위해 경의선 기차를 타고 하루짜리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목적도 잘 모른 채 밤늦게 내린 역이 바로 운정역이다. 경의선의 옛날 역사는 운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초라하다고 해야 할까, 뭔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운정역 옛날 역사

막둥이는 결국 죽는다. 미애와 배태곤은 계속 살아간다. 막둥이의 가족들도 계속 살아간다. 착하고 순수했던 막둥이의 빈자리 너머로 화려한 일산 신도시는 번성하고, 막둥이가 어린 시절 놀면서 찾아 헤매었을 초록 물고기는 이름이 '큰나무집' 같은 음식점에서 민물 매운탕 재료로나 쓰였을지 모르겠다. 미애가 주문처럼 외우던 "보스 빠지이 시또 사무노이 보제" 러시아어로 'Бог спаси что самое Важное, 복 스파이시 쉬또 사모예 바지눼, 주여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소서'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혀 교회를 다닐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여자에게는 저 뜻도 모를 한마디가 자기만의 신이었을 것이다. 당시 부산에 살던 나에게 알지도 못하는 일산, 운정 등의 지명은 마치 쌍페떼부르크, 트빌리시, 오차노미즈, 사이공 같이 낭만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들로 여겨졌다. 그리고, 3년 뒤 나는 일산에서 살게 된다.


일산에서 살다가 운정에 생애 첫 주택을 구입하게 된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 '초록 물고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듯이 파주 신도시 개발로 운정역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몰아냈다.'라는 노래가 있듯이, 부동산 개발이 내가 품어왔던 '운정역'에 대한 낭만적 상상을 파괴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나 개인의 능력 문제라는 걸 어느 날 깨달았는데, 조세희 작가는 강남 재개발에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창작했고, '초록 물고기'도 재개발을 소재로 창작되었다고 생각했던 날이 그 어느 날이다. 나는 그 운정도 싫어져서 서울로 이사했다. 그 와중에 집수리를 위해 부부가 작은 원룸 오피스텔에서 약 한 달을 보냈는데, 그때 두 아들도 모두 학교 앞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우리는 원룸 가족이 되었다.


서울의 새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 두 아들을 불러 새로 산 가구를 조립시키고 같이 탕수육에 짜장면을 먹었다. 나와는 달리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일산, 운정 지역에 살았던 아이들은 그곳을 고향으로 인식하고 있음에 좀 놀랐다. 서울의 지금 사는 곳은 집이 될 수는 있지만 고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샘이다. 결국 우리 부모님도 고향 부산에서 살지 못하고 양산 신도시라는 곳으로 옮기셨고, 나와 내 동생은 서울에서 살고, 아이들은 또 학교 앞 자취방에서 각자의 도시 유목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날은 아들이 친구들과 술을 먹고 취해서 밤늦게 새집을 찾아왔다. 군대도 다녀온 아들이 만취해서 '아버지 미안합니다.'하고 안기는데 순간 눈물이 났다. 우리 아들은 어떤 괴로움에 이렇게 술을 마셨을까? 내가 예전에 이런 모습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젊은 날의 이 가련하고 지독한 불안을 안고 우리집을 찾아온 아들에 대한 연민이 나를 덮쳤다. 앞으로의 수많은 날들이, 그 숙취 같은 난감함들이 저 청년에게 닥쳐올 텐데 나를 닮아가는 아들은 잘 이겨낼 수 있겠지?


막둥이는 짧은 삶에서 '초록 물고기'만을 쫓고 살았던 것 같다. 가난과 소외 같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청년은 미애라는 초록 물고기를, 가족이 함께 여 살 수 있다는 초록 물고기를 쫓다가 생을 마감했다. 과한 추구는 왜곡된 성취를 낳는다. 2024년 12월, 권력 중독에 걸린 대통령 내외의 계엄 선포와 국민에 의한 탄핵을 보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좋겠다.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