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하는 하루
그만 나는 딱 질려버린 것이다. 양순한 말씨, 단정한 태도. 자신감. 그리고 다가오는 의심.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이곳에 오려하는가? 분명 으름장일거다. 떠나지 말라고, 오래 머무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근데 그날따라 으레 듣는 말이 쿡 박혔다. 언제나 당신들에게 나는 맞지 않는 옷만 입고 있는 사람이란 건가?
그럼 내게 맞는 옷은 또 뭐지. 박힌 걸 뽑으니 가슴에 가득 채워놓은 그럴싸한 얼굴, 문장들이 빠져나간다. 허위가 날아갔으면 알맹이가 남아야할텐데. 뻔할 정도로 툭 떨어진 건 구멍 난 풍선 주머니다.
어릴 적 주성치의 <쿵푸허슬>은 쉬지도 않고 했다. Asian, OCN, Movie 어쩌구.. 채널을 돌리면 꼭 한 군데에서는 했다. 나는 <쿵푸허슬>을 찾으면 그 장면이 어디든. 지금 몇 시든. 앉아 봤다. 하루는 틀자마자 환골탈태를 했고. 하루는 도끼파의 끄나풀로 시작했고. 하루는 돼지촌의 주인장에게 쫓기며 시작했고. 하루는 절세고수로서 농아 여주인공에게 예전 솔직하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사죄했다. 그렇게 20명이 넘는 <쿵푸허슬>의 아성을 만났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성은 참 한심한 인간이다. 나이를 먹고도 제 역할을 하지 않고 남을 욕하고 투덜대기 바쁘다. 모두를 바보취급한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삶에 만족하고, 지금을 바꿀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동네를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아성은 끊임없이 주절대고 그의 통통한 친구 배골은 매번 맞장구를 친다.
모두가 바보같은 아성에겐 일확천금이 꿈이다. 경찰서장도 죽여버릴 권세인 도끼파에 가입하거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세무공을 배운다면 일순간 자신의 삶이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재밌게도 그는 믿던 대로 화운사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일순간의 선택으로 절세고수가 된다.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화운사신에게 맞은 것이 잠재력을 끌어내어, 예전엔 넘볼 수 없을 정도의 고수인 돼지촌 주인부부를 구해내고, 사칭까지하며 합류하고 싶었던 도끼파를 단신으로 쳐부순다.
한심한 놈에게도 기회가 와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런 놈에게도 숨겨진 재능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악한을 원하나 강도질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착한 바보라서일까? 죽을지라도 악인을 내려칠 용기가 있어서일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아성은 밉지 않다. 영화의 대부분을 한심하게 살 수 있는 돼지촌도 싫지가 않다.
이렇게 터진 풍선을 주울 때면 '나도 참으로 한심한 놈이다'란 생각이 맴돈다. 억지로 기운 누더기 풍선에 바람을 넣을 때면, 어린 아성이 조악한 여래신장 책을 저금통 털어 산 뒤 영웅이 되기 위해 연습하듯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던 내가 떠오른다.
그런데 현실적인 삶이란 주먹과 발이 날아들 것 같자 나는 냉큼 돼지촌을 도망갔다. 이런저런 옷을 맞춰 입었지만 의심은 안팎으로 나를 간질였다.
이번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직장을 잃었다. 생긴 시간에 며칠 즐거이 도서관에 나서며 풍류를 즐겼지만 또 가슴속에 바람이 점차 인다. 이걸 한쪽으로 보내고 있으면 누구처럼 돛을 펴 나아갈 텐데. 꿈지럭거리는 빈 손바닥엔 미풍조차도 뽑히지 않는다. 그 아래로는 한심함이라는 손아귀를 벗어나려 일단 뛰려는 다리가 보인다.
그렇게 마음껏 투덜거리지도 못하는 인간이 앉아있다. 쥐고 있는 걸 내던지지도 못하고 가라앉으며 괴로워하는 인간이 있다.
이런 날이면 <쿵푸허슬>의 아성이 떠오른다.
어릴 적엔 시간을 지나 환골탈태한 아성이 보고 싶어 텔레비전 앞에 앉았지만 지금은 낡은 양복에 친구와 동네를 돌아다니는 한량 아성이 보고 싶다.
마음대로 투덜거리며 분노하고. 낄낄거리며 헛짓거리를 일삼는 싸구려 양복 한 벌뿐인 아성.
아무렇게나 표류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얼굴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