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그 행위에 관하여

백일몽

김해 공항에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서울-부산 장거리로 사 개월 정도를 만났는데 그런 연애는 또 없을 예정이다. 그날은 내가 부산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날이었다. 구포역으로 마중 나온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김해 공항장 근처로 날 데려갔다. 억새풀이 듬성듬성한 허허벌판이었는데 착륙하는 여객기가 머리 위로 지나다녔다. 어둑어둑한 들판 위로 비행기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 저기 비행기가 온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속으로 '그래 비행기가 오네' 했지만 들뜬 시늉을 했다. 예상한 대로 비행기는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활주로를 향해 부지불식간 지나갔다. 굉음과 함께 몸체가 손에 닿을 듯 하강하는 모습을 그토록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는 다시없으리라. 놀랍게도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상기된 연애 행위와 달뜬 감정이 만족스러웠다. 그 시기엔 굳이 비행기 아니라 나는 새를 보고도 오두방정을 떨 수 있었을 테다.  

그는 부친의 지인이 소개해줬다. 주선자의 의중 따윈 개나 주고 적극적으로 만남에 응했다. 늦은 저녁 우리는 부산 어느 낯선 동네에서 만났다. 지하철 역 입구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를 기다렸다. 후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타났다. 멋쩍은 듯 웃으며 다가왔다. 후광은 내가 아닌 그가 몰고 왔다. 그는 훤칠했고 풍치면 야구선수 조성민과 같은 서글서글함이 있었다. 우리는 그가 아는 술집으로 향했다. 대화는 정치 비판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모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관점을 확장 내지 심화시키고 논객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에 전화를 걸었다. 나를 소개하여주고 싶다고 했다. 기분이 좋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어찌 된 셈인지 우리는 해운대 백사장에 앉아 있었다. 해변에 앉아 맥주 한두 캔을 마셨을까,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그가 어디선가 까만 비닐 봉다리를 가져왔고 우린 그걸 나눠 쓰고 비를 피해 술집으로 이동했다. 자릴 옮겨 한두 잔 술을 나눴을 때 그의 절친이 등장했다. 그 친구라는 자는 실없는 농담을 던져대며 흥을 돋우었는데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한번 깜빡이자 집 앞에 와있었다. 경비 아저씨도 잠든 깊은 새벽이었다. 그와 나는 아파트 건물 앞에서 한참을 헤어지지 못해 포옹했고 현관 두 계단을 올라가 진한 키스를 두 번 나누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사 개월이 되는 어느 날 심심하게 끝이 났다. 그는 부친의 지원 자금으로 친구와 동업해 입시 학원을 차린 젊은 사업가였다.(꽤나 그럴싸하군) 그가 수업을 마치는 자정 즈음 통화하기 시작해 새벽 서너 시까지 전화통을 붙들었다. 꼬박 세 달을 그리 살았다. 한 달에 두어 번 부산 서울을 오갔지만 횟수로 대여섯 번이나 만났을까. 본가에는 알리지도 않고 부산에 가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연애가 사 개월째로 접어들었던 어느 날 그날도 역시 본가에 알리지 않고 부산에 와있었다. 우리는 기차역 근처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소주도 한병 정도 마셨다. 헤어지는 그날 배웅하던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역시나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헤어지고 싶다 했다. 학원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하게 되면서 경영 상태가 악화되었고 (원생 모집이 안 됨) 동업자와도 관계가 틀어지게 생겼으니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야겠다 했다. 결국 빌어먹을 연애 탓이라고 그 멍청이가 말했다. 나는 점잖게 "그래, 이해했다. 학원이 번창하길 바란다" 하고 관계를 정리했다. 친구는 나더러 멍청이라고 했지만 화가 나지 않는걸 어찌할쏘냐. 그날 이후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다시 자정 전에 잠이 들었다.

그야말로 백일몽 같은 연애였다. 백십일 몽 정도? 나는 그저 연애 행위, 낯 섬이 주는 설렘과 호기심 그리고 성에 탐닉하였을 뿐이었나.. 그렇게 쉽게 관계의 끈을 놓아버릴 줄이야. 오나전 아침부터 망측해라. 지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