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의 할머니는 요양원에 산다. 아흔이 가까워 오지만 할머니는 여러모로 ‘멀쩡’하다. 더러 내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제나 나를 보고 ‘내 새끼’라고 하시는 걸 봐서는 할머니는 크게 변한 게 없다. 요양원에서 할머니는 살아갈 날이 아득한 사람 같다. 아흔 노인의 하루도 아득하게 만드는 그곳의 할머니들은 마치 서로가 닿을 수 없는 섬 같다. 말하는 걸 좋아하고 사교적이었던 할머니가 단 한 번도 나에게 친구를 소개해준 적이 없다는 단편적 사실은 그곳의 전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서울 사는 내가 부산 사는 할머니를 요양원에서 만나는 시간은 일 년에 고작해야 두세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서는 시간이 가증스럽게도 꽤나 고통스럽다. 할머니와 작별 인사는 항상 요양원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뤄진다. 그곳에는 열다섯 대가량의 휠체어가 서너 줄의 형태로 정렬되어 있는데, 요양원에 입주해 있는 또 다른 할머니들이 빼곡히 앉아 티브이를 시청하고 계신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티브이에서 무엇이 방영 중인지 확인해보지 못했다. 내 시선은 늘 그 로비에만 가면 황망하게 허둥댄다. 다른 가족의 등장이 행여 그 곳의 할머니들에게 어떤 허전함을 남기지는 않을까 재빨리 몸을 숨기 듯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나의 할머니를 바라본다. 낯선 할머니 무리들 사이에 섞인 내 할머니의 표정은 망연자실하다. 그녀는 매번 엘리베이터 속 우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신다. 그 장면이 너무 비인간적이라, 얼른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러버리고 싶기도 하고, 닫히기 직전 다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닫힘 버튼에 가깝다. 요양원 건물을 빠져나올 때 매번 느끼는 그 홀가분함이라니. 홀가분함에 대한 죄책감은 늘 하나의 의식으로 대체된다. 부친이 아닌 모친에게 짜증 섞인 원망을 쏟아내기. “엄마, 이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 같아.” 나는 내 부모의 마음을 들쑤시고 싶다는 파고를 잠재울 길이 없다. 동시에 나는 부모의 의중과 무관하게 다짐한다. 최후의 순간에도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일’은 없으리라. 근거 없는 자신감을 뒤로 한채 나는 미래의 나에게 약속을 받아낸다. 언젠가 부모를 내가 돌보겠노라고. 시집간 딸은 살림밑천이 되고 시집 안 간 딸은 무상 돌봄 노동자가 된다는 불편한 세계에 나도 깊이 연루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할머니는 결혼 후 내내 작은 쌀가게를 운영했다.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황망히 세상을 뜬 이후에도 홀로 가게를 운영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쓰러졌다. 할머니는 한마디로 쓰러질 때까지 일을 한 셈이다. 뇌졸증이었다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 시작한 자식들이 있었지만 할머니는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다. 퇴원 후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우리 집에 한동안 기거하셨다. 언제나처럼 나를 ‘내 새끼 내 새끼’라 불렀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관대함은 보통의 할머니가 손주들을 대하는 관념적 태도보다 조금 더 유난한 데가 있었다. 며느리인 내 모친에게도 시어머니 행세를 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모친도 시어머니 눈치를 보는 일이 없었다. 그 관계는 꽤나 동등해 보였고, 어떤 때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힘의 관계가 역전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부친은 누가 봐도 효심 가득한 아들이었는데, 달리 효도하는 게 아니라, 권위를 가진 가장이 된다는 것, 그 자체가 효도였다. 부친은 늘 할머니를 살갑게 ‘어무니 어무이’ 하고 불렀고 할머니는 부친을 어색할 정도로 극진히 대했다. 부친은 할머니 눈치를 본 적이 없었고, 할머니는 부친을 대할 때 다소 쩔쩔매는 눈치였다. 내 눈에 할머니는 한시도 아들 집에서 지내는 것을 편히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하루속히 몸을 회복해 자신이 쓰러졌던 그 쌀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우리집에서 할머니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건 할머니가 내 ‘친’ 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과 겹친다.
참으로 오래 감춰진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는 부친의 생모가 아니다. 5남 2녀의 자손을 두고 있는 할머니의 ‘진짜’ 혈육은 막내 삼촌이 유일하다. 한국 전쟁을 겪고 내세울 것은 젊은 육체밖에 없었을 할머니는 다 큰 자식들이 줄줄이 있는 어느 재취 자리로 시집이란 걸 갔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가족’이 생겼다. 저절로 생긴 여섯 명의 자식들과 터울이 어지간히 나는 일곱 번째 자식이 태어났다. 할머니는 그 시절 여느 집이 그러하듯, 큰 아들에 충실한 어머니로 살며 다른 자식은 물론이고, 당신의 ‘진짜’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 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할머니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늘 할머니의 사랑을 시험대에 올리고 엄마의 자격을 끊임없이 물었다. 할머니의 죄라면 계모가 된 죄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위상은 막내 삼촌이 개천의 용이 되어 서울대를 졸업하고 부유한 사업가의 길을 걷자 상승했다. 삼촌의 세속적인 ‘성공’은 분명 할머니의 말 못 한 세월의 설움을 씻겨 주었다.
할머니의 인생이 어느 점에 도달했을 때, 아니 삼촌의 인생이 어느 지점에 도달했을 때, 할머니는 자연스레 삼촌의 서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른 자식들은 막내 삼촌이 할머니를 모시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할머니는 ‘모셔지는’ 동안 삼촌의 아들인 손주를 키워냈다. 할머니의 시간은 늘 자식의 필요에 따라 유동적이고 분절적이었다. 할머니가 오롯이 시간의 주인인 적이 언제였을까. 그러나 그때만해도 할머니는 생기가 넘쳤다. 할머니는 사교적이고, 유쾌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다닌 탓에 저절로 익힌 일본어를 잊지 않고 일본 동요를 곧잘 불렀으며, 영단어로 대화의 추임새를 넣으며 대화의 흥을 지피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또래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인정받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중에 자식을 서울대에 보냈고 큰 아들도 둘째 아들도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자식농사’의 결과물은 할머니가 다른 사람과 섞여 있을 때 일종의 자긍심 같은 걸 심어주었다. 자식의 존재가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는 십여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당신의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얼마지 않아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막내 삼촌과 숙모는 일 년에 두세 번 요양원을 찾았다. 부산에 있는 자식이라고 요양원을 더 많이 찾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 년 전 요양원으로 발길을 끊은 한 사람이 있다. 나의 막내 삼촌. 할머니의 ‘진짜’ 핏줄인 삼촌이 생을 마감한 지 오 년이 되었다. 여전히 할머니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오 년의 시간을 어떻게 삼켜 나가고 계신 걸까. 할머니의 의식이 여전히 ‘멀쩡’ 한 것은 막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사는지’ 알아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의지의 반영이 아닐까. 할머니는 이제 삼촌의 안부를 묻는 일을 겁내는 눈치고, 자식들도 애써 모른 척 지낸 지 오 년이다. 자식들은 어쩌면 할머니가 끝내 그 사실을 모른 채 이번 생을 마감하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삼촌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가족들이 할머니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생각한다.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할머니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를 위한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는 한 이 집안의 남매들은 할머니를 곧잘 이 집안에 아무 몫도 없는 사람처럼 대했으므로.
그럼에도 할머니에게는 가족이 있다. 아니 가족만 있다. 그 가족들은 할머니의 돌봄 비용을 분담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자신의 생의 마지막 시절을 돌아보고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도록 돕는 가족은 없다. 비극은 달리 비극이 아니다. 할머니에게 이런 ‘가족’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할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가족이 고통이라는 수사는 적어도 이 가족사에는 참으로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