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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도슨트 Mar 19. 2021

흑사병, 공포가 만든 것들

역병과 민간요법 산업의 성장

그림으로 읽는 부의 역사

역병이 창궐한 富의 역사_03


파올 퓌르스트, <로마의 부리 의사>, 1656, 판화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분되지 않는 괴상한 정체가 서 있습니다. 전신은 온통 검은 옷으로 둘러싸고 얼굴에는 새 부리 모양의 가면으로 가려져있지요. 마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조금의 틈새도 허락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손에 든 이상한 지팡이를 앞으로 향하며 걸음을 옮기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림 왼쪽 하단에는 어린아이들이 요상한 그를 피해 도망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도시로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일까요? 베일에 싸인 요상스러운 그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기괴한 복장의 흑사병 의사

  요상스러운 행세를 한 정체는 ‘흑사병 의사’입니다. 14세기 의약기술은 흑사병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리로 된 눈구멍과 향료로 채워진 긴 부리가 달린 마스크는 방독면이었고, 지팡이는 환자를 직접 접촉하지 않기 위한 진료 도구였습니다. 가죽 모자를 시작으로 발끝까지 뒤덮은 가죽 코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역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흑사병 의사가 주로 활동한 곳은 희생자가 많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을에서 고용해 돈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흑사병의 혼란 속에도 몇몇 의사들은 특별 치료를 명분으로 돈을 추가로 요구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흑사병 의사들은 전문 의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흑사병 의사 복장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공포심을 주었으며 돌팔이 의사들의 많아 그리 평판이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공포가 만든 것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문화, 경제, 생활 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화예술계에 많은 화가와 소설가들이 흑사병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지요. 당시 유명한 작품 중 한 작품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지오바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작품 ‘데카메론Decameron’입니다. 현대 소설의 원형으로 손꼽는 데카메론은 음탕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인과 성직자들의 불륜, 간음 등 온갖 낯 뜨거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풍자와 해학의 우화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흑사병 당시 시대상을 알 수 반영하는 작품입니다.  


종교 권력의 약화

  흑사병으로 까맣게 변해가는 몸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단테Dante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 나오는 지옥의 형벌 모습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신의 분노’,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을 매질하며 신에게 자비를 구걸합니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한 것이지요. 인간의 간절한 신앙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신의 자비는 없었습니다. 흑사병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의사와 성직자였습니다. 흑사병은 종교권력에 큰 치명타를 입히고 서서히 권력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흑사병 이전 세상을 지배했던 성직자도 흑사병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고 사람들이 믿었던 신앙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신이 인간을 버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방탕한 삶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당시의 시대상이 예술작품으로 나타납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채찍질 고행단 행렬>, 1812-14


흑사병 치료제가 탄생시킨 새로운 산업

  당시 의사들은 흑사병의 원인이 악마에게 오염된 공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공기 차단과 몸에서 향기를 피우기 위해 꽃과 허브를 주머니에 담아 휴대하고 다녔고, 이 치료법은 지금도 사용하는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 치료로 발전합니다. 중세시대 유럽의 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거리에는 죽은 동물의 사체가 널려 있었고 썩은 오물들은 하수구로 흘러갔습니다. 목욕이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한 유럽인들은 목욕을 회피하고 오염된 공기를 막으려고 창을 완전히 닫아 밀폐된 생활을 했습니다. 한편, 상류층은 공기를 정화하기 위하여 향수를 사용하였고 더러운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향수용품 발전에 기여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열악한 환경과 오염된 물은 뱅쇼를 탄생시킵니다. 와인과 물, 각종 향신료를 넣어 끓여 먹는 따뜻한 와인을 뱅쇼라고 합니다. 중세시대 뱅쇼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흑사병으로 물이 오염되고 마실 물이 부족해지자 뱅쇼를 물 대신에 마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건강에 좋은 민간요법으로 소문이나 소비량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렇듯 중세시대의 열악한 환경과 미신적인 생각은 민간요법 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게 됩니다.


인류의 비위생적 생활이 가져온 흑사병은 향신료, 아로마테라피, 향수, 뱅쇼 등 

민간요법 산업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귀족들은 비싼 향신료를 구입하고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산업은 새로운 부를 창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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