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전쟁: 달러 패권, 스테이블코인에서 새 시대를 열다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시대의 패권을 결정짓다

by 인문학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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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점, 그리고 화폐의 시대

빛바랜 흑백의 그림 한 점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1694년, 런던의 한 고풍스러운 방 안. 묵직한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은 긴 가발을 쓰고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서명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깃펜과 양피지가 놓여 있고, 한 남성은 중요한 문서를 들어 올린 채 주변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바로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설립 헌장이 봉인되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인류 화폐 역사의 거대한 변혁을 알리는 서곡과도 같습니다. 민간이 주도하는 중앙은행의 탄생, 그리고 국가의 부채를 담보로 한 '신용 화폐'의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변곡점이었습니다. 이 변혁은 파운드 스털링이 세계를 호령하는 '기축통화'로 등극하며 대영제국의 번영을 견인하는 초석이 됩니다. 화폐는 이제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닌, 국가의 권력과 패권을 상징하는 심장이 된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격변을 거치며 유럽은 폐허가 되었고, 대영제국의 그림자도 희미해졌습니다. 그리고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휴양지 브레턴우즈에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집니다.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 '금(金)'을 매개로 한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 질서를 구축한 것입니다. 달러는 금과 교환될 수 있는 유일한 통화가 되었고, 이는 곧 '달러가 곧 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명실상부한 기축통화의 왕좌에 오르게 됩니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을 중단했음에도, '패트로 달러' 시스템이 석유 거래의 주된 결제 수단으로 달러를 고정시키며 그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그림 속 달러는 이제 세계 경제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그림은 다시 한번 흔들립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는 '신용'이라는 추상적인 기반 위에 세워진 현대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은행, 증권사, 보증기관 등 신용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오버헤드(Overhead)'가 오히려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익명의 '나카모토 사토시'가 비트코인을 창조하며 한 줄기 섬광을 던졌습니다. 비트코인은 FRB(미국 연방준비제도) 음모론에 뿌리를 두며 중앙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발행량이 제한된 '디지털 금'으로서 미래 통화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블록체인이라는 투명하고 위변조 불가능한 기술은 기존 시스템의 비효율과 불신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잠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때 비트코인이 언젠가 달러를 대체하는 '미래의 기축 통화'가 될 것이라는 장기적 전망까지 나올 정도로,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은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히 대체되지 않습니다. 강자는 변화를 흡수하고 재정의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25년 7월 미국 의회를 통과한 '스테이블코인 법안'은 단순한 가상자산 규제를 넘어선, 달러 패권의 새로운 심장을 이식하는 역사적 행보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미국은 왜 이 시점에서 스테이블코인 시대를 열 수밖에 없었을까요?


첫째, 디지털 금융 혁명의 파고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넷과 모바일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화폐도 디지털 형태로의 진화를 요구받았습니다. 느리고 비싼 기존의 국제 송금 및 결제 시스템은 더 이상 디지털 시대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더 빠르고 저렴하며 효율적인 거래 수단을 갈구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기존 금융 인프라를 고집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디지털 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고, 이 흐름을 선점하지 못하면 달러의 영향력은 서서히 잠식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둘째, '디지털 달러'로 패권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포석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그 이름처럼 미국 달러와 1:1로 가치가 연동됩니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형태의 달러'인 셈입니다. 미국은 국가가 직접 발행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육성함으로써, 통화 발행 주도권은 유지하되 달러의 유통 채널을 전 세계 디지털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하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패트로 달러가 석유 거래를 통해 달러의 국제적 수요를 창출했듯이, 스테이블코인은 전자상거래, 디파이(DeFi), 글로벌 송금 등 모든 디지털 경제 활동에서 달러의 사용을 촉진하며 그 수요를 증폭시킬 것입니다.


셋째, 글로벌 화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들이 자국 CBDC 개발에 속도를 내면서, 미래의 국제 금융 질서는 다자화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CBDC 감시국가 금지법'을 통해 정부 주도 CBDC의 잠재적 위험(감시 강화 등)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동시에, '탈중앙화'와 '민간 혁신'이라는 미국적 가치를 바탕으로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금융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자유 시장 경제 체제와 민주적 가치라는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디지털 금융 영역에서 재확인하려는 포괄적인 전략입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역할은 이러한 전환을 가속화하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세계의 암호화폐 수도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가상자산 관련 법안 추진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는 이번 주를 '크립토 위크'로 선포할 정도로 가상자산 산업에 대한 강력한 친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중국과 러시아 등 신흥경제국 연합체인 브릭스(BRICS) 국가들이 미 국채 매입을 줄이면서 미국의 이자 부담이 커지던 시점에 나왔습니다. 달러 가치에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의 활성화는 미 국채에 대한 수요를 높여 미국 정부의 재정 운영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습니다. 또한, 파이낸셜타임즈(FT)는 이번 입법이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규제 리스크에 직면했던 가상자산 업계가 지난 대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얻어낸 정치적 결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정치적 의지와 경제적 필요, 그리고 업계의 로비가 결합하여 스테이블코인 시대의 개막을 앞당겼음을 시사합니다.


영란은행의 탄생부터 브레턴우즈, 패트로 달러 시대를 거쳐온 화폐 패권의 그림은 이제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붓질을 통해 다시 그려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비트코인이라는 '혁명'의 씨앗이 가진 잠재력을 간파하고, 이를 '달러의 디지털 복제'라는 형태로 흡수하여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테이블코인 시대는 단순히 가상자산의 성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디지털 경제의 혈류가 될 '디지털 달러'를 통해, 21세기에도 변함없는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역사적이고도 필연적인 선택이자, 인류 화폐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거대한 변곡점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화폐를 둘러싼 패권 다툼의 역사가 또 한 번 극적으로 전개되는 격동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지금, 글로벌 화폐전쟁의 마지막 장이 열리는 혁명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단순히 오늘의 시세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역사를 통해 인문적 관점으로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스테이블코인 시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권력과 기술, 그리고 인간 욕망이 얽힌 화폐의 깊은 역사를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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