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탐험하라면서, 계열사는 왜 숨겼을까
멈추지 말고 탐험하라는 역동적인 슬로건은 오랫동안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낭만적인 주문이었습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산의 정상에 오르는 알피니스트의 이미지는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과 인간 한계의 극복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대변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아웃도어 제국을 일군 노스페이스의 본사가 무려 여든두 개의 계열사를 투명한 공시의 시야에서 숨겨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우리는 기묘한 배신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대자연의 모든 구석을 탐험하라며 우리의 등을 떠밀던 그들이 정작 자신들이 지배하는 자본의 지도는 철저히 은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업의 일탈을 넘어 우리 시대의 브랜드가 소비자를 기만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을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웅장하고 아름다운 생태 공원을 조성해 놓고 그 지하에는 아무도 모르게 거대한 폐수 처리장과 복잡한 파이프라인을 거미줄처럼 얽어놓은 위선적인 무대 장치와 같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끝없는 도전과 투명한 자연의 섭리를 찬양하는 서사가 화려한 조명 아래 공연되지만 무대 뒤의 보이지 않는 장막 너머에서는 법망의 감시를 피해 자신들만의 거대한 왕국을 증식시키는 은밀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내민 지도를 들고 험지를 탐험한다고 믿었으나 실상은 그들이 교묘하게 가려놓은 사유지의 울타리 안에서 소비라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파생 실재로 대체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이 거대한 아웃도어 기업이 팔아온 것은 등산복이라는 물리적인 단열재가 아니라 자연과 동화되고 한계를 극복한다는 숭고한 기호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탐험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이미지를 복제하여 대중에게 판매하면서 정작 기업의 실체는 투명한 공시라는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철저히 격리시켰습니다. 시장의 감시를 받아야 할 권력은 은폐되고 대중에게는 조작된 낭만만이 주어지는 이 기형적인 구조는 거대 자본이 법과 제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재편하는 현대판 은신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극한의 환경을 극복하라는 철학을 설파하던 이들이 정작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대자연의 장벽이 아니라 자본의 독점을 제어하려는 국가의 합법적인 규제 장벽이었습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라는 호기로운 외침은 결국 규제의 사각지대를 개척하여 부의 세습과 문어발식 확장을 은닉하려는 기업의 탐욕을 덮기 위한 훌륭한 위장막으로 쓰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옷을 입고 산의 정상에 올라 호연지기를 기르는 동안 그들은 차명과 은폐라는 골짜기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은밀한 금고를 짓고 있었던 셈입니다.
진정한 탐험은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자신을 투명하게 내던지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자본의 탐욕을 가리기 위해 대자연의 숭고함을 도용하는 행위는 결국 브랜드가 쌓아 올린 신뢰의 빙하를 밑바닥부터 녹아내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이 대자연의 매서운 추위를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끄러운 민낯을 가려주는 두꺼운 위선의 외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낭만적인 탐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기 마련입니다. 여든두 개의 숨겨진 그림자를 안고 세상을 향해 자연을 탐험하라고 외치는 저 공허한 메아리 앞에서 우리는 지금 누구의 지도를 들고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 서늘한 의심을 품어야 할 때가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