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다녀와서
쌍문동, 도대체 얼마만이냐. 거기에서 얼결에 두 달 여를 머물렀다. 처음엔 그 동네로 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눌러왔던 기억과 감정들이 되살아날까 봐, 한 번 동네를 뜬 뒤론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거기에 돌아오다니. 동네는 많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남편은 나와 함께 쌍문동에 며칠 머물다가 회사 때문에 뉴질랜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덩그러니 홀로 남아 고독과 갑자기 생겨버린 무한한 시간과 싸워야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내가 원한 대로였다. 한국 방문, 단기임대숙소, 가족 및 친구와 즐길 충분한 시간 그리고 결혼 생활 내내 꿈꾸었던 자유. 나에게만 오롯이 쓸 수 있는 시간등. 처음엔 좋을 줄 알았다.
남편이 뉴질랜드로 출국한 그날 밤부터 문제였다. 자고 있는데 눈앞에 검은 형체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가위눌림이 시작되고 나는 어깨와 목이 조여 오는 기분을 느끼는 가운데 남자로 추정되는 그 형상의 얼굴을 똑똑히 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두려움, 내가 눌러둔 두려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속으로 외쳤다. 쳇 뭐야 아무 힘도 없는 게. 그러자 그 형상은 스르르 내 옆으로 눕더니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겨우 첫날에 이런 일이 생기니 기가 꺾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가끔 알 수 없는 형체들이 꿈속에 나타났다. 남편이 없다는 것에 아니 아무도 없다는 것에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혼자 산 것은 머리털나고 처음이다. 혼자 사는 것은 생각보다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나처럼 혼자 잘 노는 편인 사람도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나는 혼자 사셨던 엄마와 이모,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외로웠을까. 엄마와 이모가 고독감과 불안을 내비치셨을 때 나는 어떻게 했었지?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왜냐면 나는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해 공감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가족이 없으니 나 혼자만 챙기면 되는데 그것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가족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삶이었던 때가 슬그머니 그리워졌다. 그 일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위해서도 별반 해줄 것이 없었던 것이 한국에 있는 동안 턱관절 통증이 도지고 장염까지 걸려서 제대로 먹지도 누굴 마음껏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친구들은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고 여러 가지로 챙겨주었지만 몇몇 지인들에겐 연락을 미루었다. 괜히 미리 약속을 잡았다가 지키지 못할 상황이 되면 미안했기에.
이쯤 되니 나는 내가 왜 이 동네에 떨어졌는가 사색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브런치에 올렸던 꿈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빠가 나를 위해 비싼 공연 티켓을 예매했고 나는 공연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버스를 타고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내리자마자 바뀐 동네 모습에 어디로 갈지 몰라 헤메였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했다. 뭔가 말하다가 이상하다 아빠는 돌아가셨는데 하며 잠에서 깼다.
어쩌면 그것은 예지몽이었을까. 비싼 티켓.. 두 달을 단기임대 숙소에서 머무는 것은 아무리 비교적 저렴한 숙소라 하더라도 기본으로 들어가는 돈이 만만찮았다. 예정을 훌쩍 넘겨 머무르면서 도대체 나는 무슨 공연을 보았는가. 아니다. 공연은 내가 하고 있었다. 지불도 내가 하고.
아주 심심한 공연, 절망과 외로움과 싸우는.. 러브 스토리.. 였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러브스토리는 없었다. 아빠, 아빠가 절 여기로 부르셨나요? 도대체 뭣 때문에?
아무튼 시간이 남아돌았다. 병원에 다니는 것 말고는 틈틈이 산책을 했고, 서점과 쇼핑몰에 자주 갔다. 쌍문역은 생활 밀접 편의시설에의 접근성, 저렴한 시장물가등이 만족스러웠다. 밤에 돌아다니기에 안전하고 맛집도 많았다. 쌍리단길.. 지금도 생각나는 쌍리단길, 거길 얼마나 자주 산책했던가. 동네 제일의 드립커피 전문점에서 고단한 마음을 달래고 집에 오는 길에 쌍리단길 빵집에서 밤페스츄리를 사 와 음미하는 일은 또 어떤가. 행복이 보슬보슬 밤페스츄리로 화한 것 같았다.
궁금했던 피아노 연습실도 정기권을 끊어 오갔다. 친구들과 맛집에 가고 밤에 숙소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무알콜 맥주이긴 해도) 촛불집회에도 두어 번 가서 뉴질랜드에 살면서도 못내 하고 싶었던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 친구가 매주 집회에 나가기에 친구와 함께하는 기쁨도 더불어 누릴 수 있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치과치료도 무난히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