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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Jun 13. 2024

모닝 페이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

쓰다 보면 되겠지 생각한다. 쓰다 보면 뭐가 되나. 뭐가 되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글 쓰는 일이 즐거워서라고 하고 싶다. 손과 머리와 심장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순간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저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만 버리면 아무렇게든 쓸 수는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인생의 한 부분을 만들고 있는 것에 의미를 둔다. 무조건 많이 쓰고 하나의 아이디어만을 담아라 라는 글쓰기 조언은 방심하면 잊어버리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 내내 유념하려 했던 생각이다. 그러면 하나의 글은 나올 수 있다.


여기저기서 글쓰기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본다. 폴 오스터는 무언가 머릿속에서 윙윙거릴 때, 그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글을 시작한다고 했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하나의 글을 쓴 뒤, 적어도 15분간은 다른 중요한 일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무언가 더 올 것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는 포르노를 볼 때 느끼는 생소함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조언들은 가끔은 생각이 나고 가끔은 잊어버리기도 하며 내 곁에 있다. 요즘 작가의 서랍에 들어가면 항상 먼저 읽는 것은 기적수업이란 책에서 받은 영감이다. ‘사랑스런 생각으로 사랑스런 행동을 하면 두려움이 없다. 완벽한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친다’이다. 왠지 모르나 내가 어떤 것을 시작할 때 그 구절이 길을 잡아준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에서 나오는 행위인가.


세상은 아침마다 마땅히 박수를 받아야 한다.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것은 끊임없이 연주를 하고 있고, 변주와 즉흥성을 내포한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사건들은 나를 위해 그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에게도, 그에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를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가 그 안에서 연기하고 목격하고 짊어지고 가겠는가.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단 그를 위해 준비된 잘 짜인 각본이고 힌트다.


뉴질랜드에는 구름의 콘서트가 상시 펼쳐지고 있다. 어느 가을 한국과 마찬가지로 파아란 하늘에 하나둘 단원들이 입장하고 하나의 악보를 그려내듯이 천천히 음표들이 떠간다. 그것들은 오케스트라처럼 소리 없는 조율과 연주를 하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바뀌어있는 저 구름들의 모양은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을, 생각을, 감정을 만들어낸다. 모든 것은 변한다가 하나의 진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저 연주, 그저 눈을 하늘로 향하고 마음만 연다면 언제든 그 음악에 참여할 수 있다. 여기 하늘은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낮고 구름은 두껍고 길게 세상을 감싼다. 아오테아로아 - 길고 하얀 구름의 나라. 그것이 뉴질랜드 원래의 이름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뀌어 가는 악보를 읽고 있자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어떤 악기가 빠지고 어떤 악기가 어떤 소리로 연주를 시작하는지, 그걸 감상하는 나와 하늘의 오케스트라는 이 변화되는 음악을 시시각각 목격하는 참여자이다. 나의 입김 하나가 저 구름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라도 할까.


어떤 내면적인 욕구 때문에 먹잇감을 향해 발걸음이 빨라지는 야생본능, 어미 오리로부터 한 마리의 새끼를 빼앗고 입에 문채 내쳐 달리는 저 회색 고양이, 골목길을 돌아 어떤 이의 마당 잔디밭에서 그 오리새끼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우웽우웽 울다가 그걸 놓고 터덜터덜 돌아가는 진이 빠진 그의 절뚝거림도, 한 순간 생에서 탈락된 오리새끼도, 그걸 굳이 따라가서 목격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의지도 모두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그들을 형성할 것이다. 왜 하필 마트를 가던 내 앞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깔끔한 테두리로 떨어지는 그 사건이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일어나 보여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그 고양이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어미 오리가 7명의 새끼들 중에서 어떻게 한 명이 없어진 걸 알고 그렇게 꽥꽥거리며 찾았는지, 숫자를 셀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부피로 판단하는 건지, 남은 여섯의 오리새끼들은 형제가 없어졌는데도 왜 어미뒤에 동그랗게 줄 서기에만 급급한 건지. 어미오리는 이윽고 포기하고 남은 새끼들을 이끌고 왔던 길로 돌아가고, 달려오는 차를 풀쩍 뛰어 피하고, 어떤 차는 그들이 건너는 동안 차를 세우고 기다려준다. 그 오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차는 모른다. 어미오리의 소리가 멀리로 사라질 때쯤, 숨어있던 고양이가 입에 뭔가를 물고 달리고 달리다가 떨어뜨리고 다시 물고 달리길 반복한다. 나는 이제껏 보아왔던 대로 고양이가 그것을 뱃속으로 꿀꺽 넘기는 것으로 음악이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는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나는 그가 왜 먹을 것도 아니면서 새를 잡았는지 의아해한다. 그리고 왜 아기처럼 우웽우웽 울다가 힘들게 잡은 걸 놓고 가버렸는지. 그것은 내적인 어떤 힘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모든 게 끝나버린 사실을 알자마자 알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여 돌아가는 모습 같았다. 세상에서 저승사자의 역할도 겸해서 맡고 있어야 하는 고단함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 어떤 괴로움을 당하는가.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한 누군가의 캐릭터는 안다고 확신한 순간 그것을 미끄럽게 빠져나가버린다.


그날 마트에서 딸과 함께 베이킹 거리를 장보고 집에 와서 파운드 케이크를 만들었다.

계란 세 알이 들어갔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케이크를 보고 나도 모르게 여기에 세 마리의 오리 새끼들의 영혼이 들어갔어 라고 말한다.

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아니, 닭새끼예요 하고 말한다.

그날 계란이 든 음식을 두 번 먹었다. 파운드 케잌을 이틀 동안 아침으로 먹었다. 맛있었지만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내 턱과 입, 가슴 주변으로 불편한 느낌이 느껴진다.

그 오리새끼가 놓인 곳은 아들의 친구, 그 고양이에게 애정이 깊은 아이가 사는 집 잔디밭이다.

노오랗고 동그란 부리가 오리라는 걸 말해주는, 갈색무늬의 작은 새는 거기에 흔한 인형들처럼 늘어져 있을 것이다.

선물인가봐,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조용하고 평온한 동네에선 수상한 일들이, 소란스러운 일들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우리 곁에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누구라고 해서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럼 이 모든 것도 박수받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나는 그렇다고 말한다. 어느 하나 본분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라든가, 내가 세상과 따로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만 살짝 버려본다면,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목격하고, 누군가는 조금 더 우아하게 여겨지는 방식으로 다른 생명을 먹고 산다. 내적 드라이브와 외적 조건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은 일어나고 그중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그 일은 포기된다. 우리는 우웽거리며 신음할 수도 있고 얼마간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세상을 이루는 소리이자 음악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오는, 순환하는 음악.


음악이 잦아들고 거리가 이상스럽게 평온하지만 한편 어제와 다른 그림을 - 도로의 한 부분이 움푹 파여있고 그 주위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보려 하는 자는 볼 것이고 쓰려하는 자는 쓸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적으로 심어진 인상이다. 어떤 이는 노래해야 하고 어떤 이는 춤추고 어떤 이는 그린다. 어떤 이는 음악을 작곡하고 어떤 이는 사진에 담는다. 어떤 이는 이 모든 걸 글로 써서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계속 들어오는 한 계속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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