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어찌나 쏟아지던지... 밤새 억수로 흘러내린 빗물이 한데 모였다면 지금쯤 용의 꼬리 같은 큰 강을 이루었을 것이다. 거기엔 시커멓게 내달리는 물과 함께 돌풍도 벼락도 뇌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광경을 보게 되길 기대하며 집을 나선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말짱한 하늘이라는 건 사람을 좀 놀려먹는 것 같다. 난데없이 내 앞으로 휘청거리며 날아온 나비 한 마리가 특히 그렇다. 길을 비켜주어야 하나 멈칫한 순간 그것이 높이 떠올랐다. 검지 손톱만한 크기의 흰 얼룩이 얼굴 가까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공중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는데, 느린 날갯짓이 뚝뚝 끊어지며 이어졌다. 삼십 센티미터 앞, 다시 삼십 센티미터 앞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허공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비행이라고 하기엔 다소 변칙적이어서 다음을 예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장애물-나-을 피했으니 다음엔? 좀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가 그친 후의 아침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동네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습기에 찬 공기가 코로 입으로 흘러들었다. 나비가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못내 궁금했다. 허공을 몇 번이나 미끄러지면서 날개가 젖는 줄도 모르고 가야 하는 곳이란 대체 어디일까. 문득 동네 뒷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무더기로 피어있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간밤의 난리가 거기에도 들이쳤다면 열에 아홉은 죽었을 것이다. 뚝뚝 떨어진 꽃 모가지들이 진창을 뒹굴고 있는 모습이 언뜻 그려졌다. 달려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꽃잎도 줄기도 크게 상한 데 없는 꽃들이 대부분이었다. 눈길을 붙든 것은 살아남은 꽃들의 말간 낯빛이었다. 오래 견디느라 초췌해졌을 뿐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꽃잎에서부터 뚝뚝 흘러내린 빗물이 줄기를 타고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열린 꽃의 안쪽을 주시했다. 어쩌면 이토록 여린데 이토록 강할 수 있을까. 그만 어떤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희미한 안갯속의 사람이었다. 예측할 수는 있어도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저 꽃처럼 여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그가 저 꽃처럼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또한 마음이 따스해졌다. 이런 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때 어디선가 날갯짓 같은 바람이 차례차례 불어왔다. 꽃들이 잇따라 흔들렸다.
2021.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