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걸 어기면 계약 해지"

- 금지행위 조항, 어디까지 유효한가

by 송혜미

요즘 엔터테인먼트 계약서에는
본문 말고 별지가 하나 더 붙는 경우가 많다.

이름도 다양하다.

생활강령
행동수칙
준수사항
아티스트 윤리규정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이성 교제를 할 경우 사전에 소속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SNS 게시물은 소속사의 사전 승인 없이 게시할 수 없다."

"음주, 흡연, 문신은 금지한다."

"위 사항을 위반할 경우 소속사는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많은 연습생들이 이 문서에 별생각 없이 사인한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소속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인하셨잖아요."

정말 그 말이 끝일까.

= 사인했으면 다 유효한가

연습생과 신인 아티스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

"사인했는데도 무효가 될 수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계약 내용이 아무리 당사자 합의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법이 정한 한계를 넘으면 효력이 없다.

사인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서를 절대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계약에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 법이 정한 한계

우리 민법은 이렇게 규정한다.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는 무효.

쉽게 말하면 이런 뜻이다.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계약은 아무리 사인을 했어도 효력이 없다."

금지행위 조항을 이 기준으로 보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유효할 가능성이 높은 조항

소속사 입장에서 합리적인 이유가 있고 제한의 범위도 명확한 경우다.

예를 들어 이런 조항이다.

"촬영 일정 중 음주 금지."
"소속사 미공개 정보 외부 유출 금지."
"계약 기간 중 타 기획사와 별도 계약 체결 금지."

이런 조항은 업무 수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법원도 대부분 유효한 계약으로 본다.

연애 금지 조항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성인 아티스트라면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미성년 연습생이라면 보호 목적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SNS 관리 역시 최근에는 소속사의 일정한 관리 권한을 인정하는 흐름이 있다.

결국 같은 조항이라도


누가 계약 당사자인지
제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이 두 가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 사실상 무효에 가까운 조항

여기부터는 법원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다.

대표적인 것이 24시간 연락 의무 조항이다.

"소속사의 연락에 24시간 내내 곧바로 응하지 않으면 계약 위반으로 본다."

이 문장이 실제 계약서에 존재한다.

심지어 새벽이든 휴일이든 즉시 응답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에게 24시간 대기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사생활과 휴식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계약이 아니라 통제에 가깝다.

또 하나는 가족 연락 제한 조항이다.

"소속사의 허락 없이는 가족을 포함한 외부인과 연락을 제한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조항을 본 적이 있다.

가족과의 연락까지 통제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통신의 자유와 가족관계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침해한다.

아무리 연습생이라도
아무리 사인을 했어도
이런 조항은 효력을 인정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위약금 조항은, 있고 없고 보다 얼마인지가 중요하다.

위약금 자체는 유효하다.

계약 위반 시 손해배상액을 미리 정하는 것은
법이 허용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금액이다.

민법은 부당하게 과다한 손해배상 예정액은 법원이 감액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연습생이 연애 사실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수억 원의 위약금을 청구받은 사건이 있었다.
법원은 그 금액이 과도하다고 보고 대폭 감액했다.

위약금 조항은 있는지 없는지도 중요하지만 얼마인지가 더 중요하다.

= 위법하면 계약 전체가 무효일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금지행위 조항이 위법하다고 해서 계약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법은 법률행위의 일부가 무효일 경우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유효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위법한 조항만 제거되고 나머지 계약은 그대로 살아있다.

예를 들어,

24시간 연락 의무
가족 연락 제한

이런 조항이 무효라고 판단되면
그 조항만 효력을 잃는다.

수익 배분
활동 범위
계약 기간

이런 핵심 계약 내용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상담자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 조항이 무효라면 계약 전체도 무효 아닌가요?"

대부분의 경우
그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 별지가 더 위험한 이유

본문 계약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표준화되어 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표준계약서가 있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도 있다.

하지만 별지는 다르다.

별지는 대부분 소속사가 자체적으로 만든 문서다.

법적 검토 없이 만들어진 경우도 많고
본문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아티스트의 일상을 통제한다.

문제는 별지도 계약서의 일부라는 것.
사인했다면 그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별지를 받았다면 계약서 본문만큼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특히 다음 세 가지는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1. 금지행위의 범위가 업무와 직접 관련 있는지
2. 위반 시 제재가 계약 해지인지, 위약금인지, 둘 다 인지
3. 위약금 액수가 구체적으로 얼마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 조항이 있다면 사인 전에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

사인하고 나면
그 조항을 무효로 만드는 일은
훨씬 오래 걸리고 훨씬 어려워진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별지도 계약서가 된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이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읽지 못했습니다."

읽었는데 이해가 안 됐다면 그건 사인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사인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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