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시간 동안 달린 기차는 드디어 최종 목적지 라싸에 도착했습니다. 불과 몇 달 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포탈라궁의 웅장한 자태와 라싸의 푸른 하늘만 볼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이곳 라싸에 도착하게 된 것이죠. 라싸 중심가는 이미 많은 부분 중국화 되어있었지만, 구시가에 들어서니 그래도 티베트의 원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이곳은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여서 고기를 그대로 실온에 매달아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사람들은 다들 마치 택견을 하듯이 사뿐사뿐 걷고 있네요. 이 역시 해발고도가 높아서 공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티베트에서는 고기를 실온에 그대로 매달아 팔고 있었다
하루에 3500원짜리 허름한 호스텔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공안이 잠입해 있다 허가증이 없는 나를 잡아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불쑥 들었습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양손에는 춘천 지역 마트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방에 모여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소리쳤습니다. "혹시 춘천사람이세요?" 제가 들고 있던 지역 마트 봉투를 보고 역시 여행 중이던 춘천 사람이 저에게 소리친 거죠. 티베트 라싸에서 그냥 한국 사람도 아닌 춘천 사람을 만나다니! 저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허가증 없이 티베트로 온 사람이 저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습니다.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요? 그날밤, 해발 고도 4000미터 고산 도시 라싸에서 처음으로 고산병을 경험했습니다. 영혼의 나라에 와서 영혼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고산병에 걸려서 정말 죽을뻔 했다...
처음의 목표는 라싸였지만, 이곳에서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고산병도 점차 나아지고 공안들을 마주쳐고 그다지 긴장되지 않네요. 욕심이 생겼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진짜 티베트를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싸를 벗어나 티베트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암드록쵸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왕복 5시간 거리를 이동할 택시를 구했고, 통역을 위해 통행할 중국인 친구도 구했습니다. 라싸를 벗어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드넓은 초원이 나왔고, 사방에서 오색 타르초가 바람에 거침없이 흔들립니다. 좁디좁은 험준한 고갯길로 2시간 넘게 달린 끝에 암드록쵸에 도착했습니다.
태양이 비친 호수빛은 에메랄드 빛 그 자체였고, 호수가에는 블랙야크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습니다. 함께 간 일행과 암드록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호수를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 위해 산으로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오색빛깔 타르초가 바람이 정신없이 휘날리는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만년설이 쌓인 닝진캉사펑, 그리고 그 아래 바다같이 푸른 암드록쵸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겼습니다.
하늘호수로 떠난 택시
티베트 라싸는 역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안착되어 있는 포탈라궁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티베트인들이 오체투지를 하면서 이곳 라싸로 순례를 오는 것입니다. 순례객들은 포탈라궁을 들른 후 순례길의 종착지인 조캉사원으로 향합니다. 조캉사원으로 가는 길을 바코르라고 하는데 순례객들은 이 바코르를 역시 시계방향으로 오체투지를 하며 돕니다. 바코르에는 순례하는 사람들과 여행객들이 이리저리 섞여서 매우 혼잡합니다. 바코르를 한 바퀴 돌아 조캉사원의 광장에 들어서니 순례객들이 조캉사원 벽을 향해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이슬람 성전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절을 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지러운듯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절을 하는 사람들 위로 바람의 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오색 타르초가 무수히 펄럭이고 있습니다.
조캉사원에서 절을 하고 있는 순례객들
중국은 서부개척의 일환으로 한족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서부개척의 최전방 티베트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티베트의 중국화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라싸의 거리명은 중국의 주요 도시 이름으로 변했고, 점차 음식점들의 메뉴판에서도 티베트어보다 한자가 더 많이 보입니다. 모든 게 중국과 다 똑같은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라마교 승려의 뒷모습을 본 후, 티베트의 중국화와 라싸 경관 변화의 실체를 충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티베트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조캉사원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이곳에는 ‘마아자이’라는 전통 찻집이 있습니다. 티베트 전통 차를 시키고, 창밖으로 바코르를 순례하는 사람들과 조캉사원 벽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봅니다. 20대 초반의 찻집 종업원은 외국인을 보니 호기심이 들었는지 조심스럽게 저에게 말을 겁니다. 저는 이곳에 중국의 서부개척과 라싸의 경관변화에 대해서 논문을 쓰기 위해 여행을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자신도 티베트 역사가 잊히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옆에 걸려있는 타르쵸를 펼쳐 보이며 거기에 적혀있는 의미와 티베트의 역사에 대해 저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찻집으로 중국 공안들이 들어왔고, 티베트 청년은 깜짝 놀라며 탁자에 펼쳐놓았던 타르초와 티베트를 탁자 밑으로 숨기며 이내 자리를 떴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갑자기 중단되었고,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일제 통치를 받던 식민지 조선 경성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티베트 대학생이 설명해 준 타르초를 양손에 들고 마치 식민지 조선 독립군의 모습처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Free Tibet!
본 여행기는 제가 쓴 여행 에세이 '여행이 부르는 노래'의 에피소드 중 일부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다음 이야기 혹은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여행이 부르는 노래'를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