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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Sep 06. 2023

흐린 명동하늘을 보며 오아시스를 꿈꾸다

[낭만 여행기] 영국 맨체스터, 리버풀

유난히도 흐린 5월 어느 날. 대낮인데도 햇빛은 두껍고 시꺼먼 구름사이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고 앞길이 막막한 30대 청년백수의 마음 역시 깜깜한 먹구름 속이다. 노량진 원룸에서 밤새 자기소개서를 쓰다 찌뿌둥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명동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로 빽빽하다. 지하철 환승역처럼 사람들과 맞닿아 걷고 있을 때,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하나둘씩 펴지는 우산들, 그리고 흐리다 못해 어두컴컴한 대낮의 하늘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문득 지금 이 장면이 영국 맨체스터 출신 밴드 Oasis 노래와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영국 맨체스터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할 1년 후의 나를 상상했다. 그날 나는 1년 후 맨체스터에 갈 것이라고 일기장에 썼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3개월 후 나는 맨체스터 킹스트리트에 서있다. Oasis의 노래가 나오는 헤드셋을 귀에 걸친 채로.


여름의 맨체스터에서는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아서 축구는 보기 힘들지만 대신 명문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장 Old Trafford 투어가 가능하다. 투어 중 내가 한국사람일걸 알아본 가이드는 박지성 선수가 쓰던 라커룸과 그가 맨유에 남긴 소중한 기록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경기장을 나와서 맨체스터의 거리를 걸었다. 때로는 목적지가 어딘지 모를 트램을 타고 하염없이 맨체스터를 돌아다니며 오아시스의 음악이 들었다. 다행히 하늘은 1년 전 명동하늘만큼이나 새까맣게 흐렸다. 빗방울도 우중충하게 트램창문에 흩뿌려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맨체스터에서 오아시스의 음악을 들으며 1년 전에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기차를 타고 리버풀로 향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과거 석탄공업이 활황을 이루었던 시기에 대표적인 공업도시였지만, 석탄산업이 하향길로 접어들면서 둘 다 쇠퇴하게 됐다. 리버풀은 항구도시로서 대영제국시대 전 세계 무역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했고, 맨체스터 역시 리버풀과 연결되어 있어서 내륙의 물자나 자원을 수송하는 결절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두 도시는 상생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 두 도시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항구의 물류비용이 부담이 된 맨체스터가 이를 절감하기 위해서 리버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바다로 수송할 수 있는 운하를 건설하면서부터이다. 이는 리버풀에게 큰 타격이 되었고, 양 도시 간의 적대감은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FC 간의 축구 대리전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리버풀은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고향이다. 비틀즈의 멤버 폴 메카트니의 이름을 딴 메튜스트리트에서 펍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에 여자 셋이 앉는다. 동양인 혼자 앉아서 맥주 마시면서 헤드셋 끼고 노래를 듣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말을 건다. 웨일즈 카디프에서 왔다는 그녀들은 비틀즈 팬이다. “나는 오아시스가 더 좋아.”라고 하자 그녀들은 왜 맨체스터 안 가고 리버풀에 왔냐면서 비틀즈가 없었으면 오아시스도 없었을 거라고 한다. 어느새 공감대가 형성된 우리는 맥주를 같이 마시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흥이 오른 내가 “밖에 나가서 춤추는 게 어때?”라고 말했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제안에 그녀들은 바로 오케이 했고, 우리는 펑키음악이 가득 찬 매튜스트리트 한가운데서 신나게 춤을 추며 이 멋진 밤을 즐겼다.

비틀즈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리버풀 매튜 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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