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류재명 교수님이 춘천을 방문하시는 날이다. 류재명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2022년부터 경상북도 영천으로 귀농하셨다. 나는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 출신도 아니고 간접적으로도 교수님과 작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교수님이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까지 직접 방문하시게 되었을까.
처음 교수님을 만난 것은 2020년 초로 기억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지리환경교육학회가 열렸고, 친분이 있는 선생님이 기조강연을 하셔서 응원차 방문하였다. 평소 학회를 잘 다니지 않았지만 평소 책으로만 접하던 전국에 계신 여러 지리교육과 교수님들과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익한 자리였다.
그때 류재명 교수님도 발표를 하셨다. 직접 그리신 것으로 추정되던 펭귄과 BTS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인 강의였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 교수님께 물었다. "혹시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BTS 노래는 무엇인가요?" 교수님은 살짝 당황해하시며 "허허.. 내가 BTS 노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들어봐야겠군요."라고 대답하셨다.
학회가 다 끝나고 고깃집에서 뒤풀이 자리에 방문했다. 친분이 있던 선생님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류 교수님이 술잔을 들고 우리 자리로 오셨다. 먼저 오늘 발표를 하신 선생님께 술을 권하셨고, 그 선생님은 술을 못 하신다고 하셨다. 그때 류교수님이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렇게 글을 잘 쓰신다니! 놀랍네요."라고 대답하신 것을 듣고 교수님이 나처럼 애주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2021년 5월쯤, 학회 자리에서 잠깐 스친 인연 외에는 온라인에서도 전혀 왕래가 없던 류재명 교수님이 나의 페이스북 글에 댓글을 다셨다. 글은 '베르겐 산 정상에서 소주잔 돌리기'라는 노르웨이 여행기였다. 교수님은 내가 글에서 언급한 백야 현상 당시의 느낌과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는지 궁금해하셨다. 백야 현상에 대해 나는 '새벽 2시인데도 초저녁처럼 밝고, 새벽 4시가 넘어서 해가 지려다가 다시 떴다.'라고 표현한 것 같다.
나는 당시 찍은 사진들을 외장하드의 오래된 폴더에서 기어코 찾아냈고, 직접 느낀 백야현상에 대한 느낌을 자세히 댓글로 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한달 후, 장거리 드라이브를 하고 춘천으로 돌아오던 차 안에서 류교수님의 연락을 받았다. 메시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혹시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특강을 해줄 수 있을까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당시까지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책을 출판하거나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별것도 아닌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항구도시 산 정상에서 바이킹의 후예들과 소주 마셨던 썰을 보시고 나를 서울대학교 특강에 초청해 주신 것이다.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라고 그 제안을 겁도 없이 수락했다.
특강 제목은 '빅데이터 시대의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AI와 알고리즘 시대로 바뀌어도 이야기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이다라는 주제였다. 나는 오랫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교육학 용어와 개인적인 경험들로 풀어냈다. 당시는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라서 줌으로 강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청중들의 반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더 떨렸던 기억이 난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강의였다. 그리고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예행연습을 했다. 그 덕분에 나만의 스타일로 특강을 준비하는 방법을 익혔다. 무엇보다 이 경험이 값진 이유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내가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강의 이후 다른 곳에서도 꽤 많은 특강 요청이 왔다.
교수님과 직접 1대 1로 만난 것은 특강 예정일 2달 전인 8월 말 즈음이다. 약속 장소는 홍대입구에서 가까운 연희동 중화복춘 골드라는 고급 중식당이었다. 나는 전날 후배 녀석과 굉장히 과음을 해서 숙취가 저녁까지도 가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어제 마신 숙취가 지금 글쓰고 있는 오후 5시 15분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뭔가 데자뷔 같긴 하다.
아무튼 그날 교수님의 나이를 초월한 창의성과 무권위의 권위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여행이 부르는 노래' 원고를 출판해 줄 곳을 찾고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최대한 대형 출판사를 찾아서 직접 도전해 보는 것을 추천하셨다. 사실 나는 그때 교수님께 혹시 출판 업계에 알고 있는 지인이 있는지 은근히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교수님의 말에 부끄럽기도 했고, 이후 여러차례 직접 도전을 해서 다음 해 여름 내 책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지난달 '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가 대형 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이후에도 경상북도 영천에 2번 방문해서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미나리 삼겹살을 먹었고, 두 번째는 육회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교수님께서 내 글에 대한 과분한 칭찬을 해주셨다. '강선생님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 같아요' 사실 그동안 한 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대문호와 나 같은 초보 작가를 비교한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정말 좋았다. 교수님 덕분에 내가 그래도 꽤나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칭찬 한마디 덕분에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은 것이다.
이제 30분 후면 교수님을 만난다. 마지막에 교수님을 만날 때 한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해서 조금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 당시 나의 30대 마지막을 기념하는 의미로 '39'라는 앨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었고, 그 타이틀 곡을 지난번 영천에서 먹었던 미나리 삼겹살에 영감을 받아서 '영천 미나리'로 정했었다. 장르는 트로트 EDM. 그리고 교수님이 '영천 미나리!'라고 외치는 부분을 후렴구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 이후 신기할 정도로 유튜브가 성장하였고, 나는 영상 편집에 치이면서 곡작업은 40대 초반이 된 지금까지 못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교수님 외에도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좋은 영향을 줬던 고마운 분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게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고 작은 칭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류재명 교수님께 참 감사하다. 결국 교수님 덕분에 나는 강의를 하게 되었고, 책을 출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사의 의미로 오늘 맛있는 춘천 닭갈비를 사드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선물로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