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토리텔링] 신안에서 태어난 김신안 선생님 인터뷰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무수한 추억과 시간이 지층처럼 쌓여 있습니다. 지리에서는 이를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의미가 부여된 '장소'로 인식합니다. 특히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독특한 장소성을 형성하게 합니다. 문득 ‘섬에 평생 살아온 사람과 육지에서 평생 산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다를까?’라는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섬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그 섬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주인공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의 한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귀를 사로잡은 것은 그분의 성함이 무려 ‘김신안’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의 이름으로 평생 살아온 사람의 삶은 과연 어떨까요? 설레는 마음으로 목포의 한 오리탕집에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전라남도 신안 사람들은 어린이날에 특별히 오리탕을 먹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나 피자 대신, 들깨가루와 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걸쭉한 오리탕이라니. 메뉴 선정부터 이 섬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사가 묻어나 인터뷰는 시작 전부터 흥미로웠습니다.
이석: 소개에 앞서 오리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신안 사람들은 어린이날에 오리탕을 먹는다’는 말이 너무 인상적이라 문득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보통 어린이날 외식 메뉴라면 돈가스나 짜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신안에서는 왜 하필 오리탕이었을까요?
신안: 맞아요. 저도 처음 오리고기를 맛본 날이 어린이날로 기억돼요. 사실 그건 아이들의 취향이라기보다 1년에 한 번 아이를 핑계 삼아 목포로 외식을 나오는 부모님들의 취향이었을 겁니다. 섬에 살면 삼시 세끼 지겹게 먹는 게 생선이잖아요. 그러니 특별한 날에는 생선이 아닌 육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게다가 전라도에서는 오리탕이 최고의 보양식 중 하나거든요. 돼지고기나 소고기보다 훨씬 귀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에 목포라는 도시로 나들이를 나온 섬 가족들에게 특히 어른들에게 오리탕은 최고의 메뉴였죠.
이석: 그럼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와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세요.
신안: 안녕하세요.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나 이름까지 신안이 되어버린 김신안입니다. 제가 처음 이름을 밝히면 백이면 백 모두가 "진짜 본명 맞느냐?"고 되물으세요. 아버지가 고향 땅 이름을 따서 너무 무성의하게 지으신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평생 듣고 살았죠. 어릴 땐 이름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이 “신안아!” 하고 부른 뒤에 자기 집 주소를 대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길가에 지나가는 ‘신안여객’ 버스를 보며 “저게 다 네 집 것이냐”고 묻곤 했죠. “넌 신안이냐? 난 목포다!”라며 유치한 장난을 하던 친구도 기억나네요. 심지어 저희 외할머니께서는 제가 커서 ‘신안 군수 각시’가 되어 고향을 다스릴 거라는 같은 이야기도 종종 하셨어요. 저에게 이 이름은 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평생 고향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이석: 저로서는 그 이름 덕분에 선생님과 만나게 된 것이니까 아버님께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그럼 신안군의 수많은 섬 중 선생님의 고향은 정확히 어디인가요?
신안: 저는 신안군 압해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압해도는 목포 북항에서 배로 딱 10분 정도면 닿는 육지와 아주 인접한 섬이었어요. 2008년 압해대교가 놓인 후로는 이제는 차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실상 육지가 되었지만요. 당시에도 압해도는 신안군 내에서는 가장 육지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먼 섬 사람들로부터 “압해도는 섬도 아니다”, “헤엄쳐서도 가겠다”라며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10분 거리라도 배를 타야만 나갈 수 있는 섬은 섬이었죠.
이석: 10분 거리일지라도 매일 배를 타고 오가는 생활은 상당한 제약이었겠는데요? 배편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신안: 요금 체계가 참 오묘했어요. 원래 목포에서 압해도로 들어갈 때 100원 다시 나올 때 100원을 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올 때만 200원을 받더라고요. 섬에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나가는 길은 그 배 하나뿐이라는 점을 이용한 거죠. 일종의 통행세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섬을 떠나려 할 때 치러야 하는 대가가 두 배가 된 셈이죠. 지금은 다리로 1분이면 건너는 거리를 그땐 배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선착장으로 달려가며 간절한 마음으로 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석: 섬에서 보낸 학창 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육지 아이들의 학교 생활과는 풍경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신안: 저는 중학교까지 압해도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육지인 목포 시내로 일명 유학을 왔습니다. 신안 섬 아이들에게 목포 고등학교 진학은 인생의 첫 번째 큰 도전이었어요. 당시엔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으니 토요일 오후가 되면 각기 다른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섬 친구들이 선착장에 다 모입니다. 섬과 육지를 잇는 그 비좁은 여객선 안은 서로의 학교 소식을 묻고 때로는 낯선 학교 학생을 짝사랑하게 되는 아주 특별한 소통의 광장이었죠. 그 시절의 배 위는 설렘과 피로가 공존하던 묘한 장소였습니다.
이석: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계기도 섬이라는 환경과 관련이 있다고요.
신안: 초등학교 때 압해도로 오시는 선생님들은 모두 목포에서 배를 타고 출근하는 외부인이셨어요. 어린 제 눈에는 그분들이 어찌나 세련되어 보이던지. 육지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 택시를 타고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는 선생님들은 동경의 대상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시골 아이들은 멀리서 차가 오면 길 한쪽에 서서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라고 배웠거든요. 비 오는 날이면 선생님 차에 흙탕물이 튈까 봐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아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기도 했죠.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도 꼭 저 선생님들처럼 번듯한 어른이 되어,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멋지게 섬을 드나들어야지’ 하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 결핍과 동경이 저를 교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지금 어릴 적 꿈이었던 빨간색 테슬라를 타고 있으니 어쩌면 꿈을 이룬 셈이네요.
이석: 고등학교 졸업 후 섬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셨죠? 그때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신안: 저는 섬의 그 단조롭고 정체된 공기가 너무 싫었어요. 항상 지평선 너머의 바깥세상을 꿈꿨죠. 가급적이면 신안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제 인생 목표 중 하나는 ‘서울 남자와 결혼해서 서울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서울 시민이 되려 무던히 애썼습니다. 하지만 당시 임용 시험의 벽은 너무나 높았고, 결국 안정적인 합격을 위해 지역 가산점이 있는 고향 전남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담했어요. 기를 쓰고 도망쳤는데 결국 다시 밀물에 떠밀려 고향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거든요. 실패해서 돌아오는 낙오자가 된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석: 현재 전남 지역에서 교사로 계신데, 혹시 발령 이후 섬에서 근무하신 적도 있으신가요?
신안: 아니요, 아직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제 인생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예요. 섬 생활의 불편함과 열악한 관사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섬 발령은 피하고 싶어요. 처음엔 영암, 그다음엔 목포, 지금은 나주에서 근무하며 어떻게든 육지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남 교사라면 언젠가는 섬으로 가야 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때가 되면 아마 저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죠. 그리고 제가 가르칠 섬 아이들에게 말해줄 겁니다. “선생님도 너희처럼 이 섬을 지독하게 나가고 싶었단다. 하지만 꿈을 꾸면 섬 밖의 세상도 너희의 무대가 될 수 있어.”라고요.
이석: 자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에게 ‘섬’이란 무엇인가요?
신안: 인터뷰 요청을 받고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 담길 내용이니 뭔가 멋진 정의를 내리고 싶었거든요. 결론은 ‘섬은 제로섬(Zero-sum)’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밀물과 썰물을 보며 살았습니다. 가득 차올랐던 바닷물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약속한 듯 밀려오는 과정을 보며 모든 것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자연의 섭리를 체득했습니다. 제 인생도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섬을 벗어나려 그토록 발버둥 쳤고, 서울로, 심지어 파견 교사로 태국 방콕까지 도망치듯 떠났지만, 결국 저는 다시 전라남도 목포 인근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를 쓰고 얻으려 했던 것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시 채워지는 그 과정이 마치 밀물과 썰물의 합이 영(0)이 되는 제로섬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흐름을 운명처럼, 그리고 평화롭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신안 선생님과 목포 시내를 여행했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 꿈이 투영된 빨간색 테슬라를 타고 말이죠. ‘김신안’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하나의 낙인이자, 동시에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섬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평생을 달려왔으니까요. ‘섬은 제로섬’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은 결국 근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되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