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담장을 쌓는 국가들

자유무역과 경제 블록의 딜레마

by 지리는 강선생

3장에서는 국경을 지우고 전 세계를 안방처럼 누비는 다국적 기업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기업들은 더 싼 임금과 더 큰 시장을 찾아 맹렬하게 이동하고, 그 과정에서 'Made in China', 'Desinged by Apple in Califonia' 같은 글로벌 가치 사슬이 만들어졌죠. 그런데 기업들이 이렇게 국경을 넘나들 때,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뒷짐 지고 구경만 했을까요? 국가는 때로는 심판처럼 경고하고, 때로는 특정 친한 국가와 비밀을 나누며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자유무역이라는 이상과 자국 우선주의라는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국가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든 WTO부터 최근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는 블록 경제의 흐름까지 깊이 있게 파헤쳐 봅시다.



심판의 탄생과 위기: 세계무역기구(WTO)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맺은 약속

시계를 1944년 7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로 돌려보겠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44개국 대표들은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에 모여 긴급회의를 엽니다. 이들은 "과거처럼 나라끼리 보호무역 장벽을 쌓고 싸우다가 대공황과 전쟁을 부르지 말자"는 뼈저린 반성을 공유했죠.

여기서 그 유명한 '브레튼 우즈 체제'가 탄생합니다. 연합국은 금융과 통화를 조율할 국제통화기금(IMF)과 전후 복구를 도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을 만들기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무역을 담당할 국제무역기구(ITO)도 출범시키려 했죠. 하지만 ITO는 정작 주도국이었던 미국 의회가 "우리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비준을 거부하는 바람에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무산되었습니다.

GATT에서 WTO로

국제기구 설립이 무산되자 급한 대로 각국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라는 약속을 맺고 무역 질서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GATT는 정식 기구가 아니라 단순한 협정이었기에 나라들에게 약속 지키라고 강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 쇼크가 터지자 선진국들은 다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슬그머니 보호무역으로 돌아섰고 GATT는 무기력해졌습니다.

결국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통해 1995년 1월 1일, 드디어 강력한 심판인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게 됩니다. WTO는 서비스, 지적재산권까지 무역의 범위를 넓히고 분쟁 해결 권한도 갖춘 명실상부한 세계 무역의 심판관이었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가는 심판?

하지만 기대와 달리 WTO의 힘은 점점 빠지고 있습니다. 2001년 시작된 도하 라운드 협상은 농업 개방 문제 등을 놓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팽팽히 맞서며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WTO가 미국에 불공정하다"며 탈퇴까지 거론했고, WTO 사무총장이 스스로 "사실상 무력화되었다"고 한탄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 세계가 다 같이 합의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진 것이죠.



우리끼리만 거래하자: 자유무역협정(FTA)


다자주의에서 양자주의로

전체 회의(WTO)가 진전이 없자 마음 맞는 나라들끼리 따로 만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무역협정(FTA)입니다. WTO가 모든 회원국에게 똑같은 대우를 해주는 '다자주의·호혜 평등주의'라면, FTA는 우리끼리만 특혜를 주는 '양자주의·특혜 평등주의'입니다. 2015년 기준으로 세계 무역량의 50% 이상이 이러한 FTA나 경제 블록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FTA라는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나라는 무역시장에서 왕따가 될 처지입니다.


FTA 모범생,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답게 FTA에 매우 적극적입니다. 칠레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EFTA(유럽자유무역연합), ASEAN, 인도, 호주 등과 손을 잡았고, 거대 경제권인 미국, EU, 중국과도 모두 FTA를 체결한 FTA의 허브이자 FTA계의 모범생 국가입니다.


한-EU FTA의 명과 암

FTA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EU FTA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협정으로 한국과 유럽을 오가는 거의 모든 상품의 관세가 철폐되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유럽산 자동차에 붙던 8% 관세가 사라지고, 프랑스나 이탈리아산 고급 와인에 붙던 15%의 관세도 없어졌으니까요. 치즈나 삼겹살도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됐죠.

국가 경제적으로도 향후 10년간 GDP가 약 8조 원 늘어나고, 일자리가 25만 개 창출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가격 경쟁력을 갖춘 유럽산 농축산물이 밀려들어 오면서 우리 농가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FTA는 전체적으로는 이득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우는 냉혹한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경제통합에도 '레벨'이 있다


끼리끼리 뭉치는 경제통합도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헝가리의 경제학자 발라사(Bella Balassa)는 통합의 깊이에 따라 4단계로 구분했습니다.


1단계: 자유무역협정 (FTA)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회원국끼리는 관세를 없애지만, 비회원국에게는 각자 알아서 관세를 매깁니다. NAFTA(현 USMCA)나 EFTA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2단계: 관세동맹 (Customs Union) FTA에서 한 발 더 나갑니다. 회원국끼리 관세 철폐는 물론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물건에 대해서도 '공동 관세'를 매기기로 약속합니다. 과거 베네룩스 3국 관세동맹이 대표적입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하나의 단일한 관세 구역처럼 보이죠.

3단계: 공동시장 (Common Market) 이제 물건만 오가는 게 아닙니다. 생산요소(노동, 자본)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습니다. 즉, 프랑스 사람이 독일 공장에 취업하고, 이탈리아 자본이 스페인에 투자하는 데 제약이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과거의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이 단계였습니다.

4단계: 완전 경제통합 (Economic Union) 통합의 끝판왕입니다. 아예 하나의 나라처럼 화폐(통화)를 통일하고, 공동 의회를 만들어 정치·경제 정책을 함께 수행합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이 단계에 도달한 유일한 사례가 바로 유럽연합(EU)입니다.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FTA 강국, KOREA'



세계지도를 다시 그리는 거대 경제 블록들


그럼 지금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표적인 '패거리(Bloc)'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미국의 몽니? 혹은 실리? : NAFTA와 USMCA

1990년대 초, 미국은 유럽이 하나로 뭉치는(EU)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웃 나라인 캐나다, 멕시코를 끌어들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만들었죠.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3국 간 교역이 급증하며 유럽을 압도하는 경제 블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미국의 공장들이 인건비가 싼 멕시코로 대거 이전하면서, 오대호 연안의 공업지대(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를 등에 업고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NAFTA는 최악의 협정'이라며 판을 엎어버렸고, 재협상 끝에 2018년 USMCA(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가 탄생했습니다. USMCA에서 주목할 점은 반(反)중국 조항입니다. '시장경제체제가 아닌 나라(중국)와 FTA를 맺으면 우리 협정은 끝이다'라는 조항을 넣어, 멕시코와 캐나다가 중국과 손잡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렸습니다.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과 중국 견제를 위해 설계된 블록인 셈입니다. EU와 달리 USMCA는 상품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력의 이동에는 매우 폐쇄적입니다. 비자를 받기 까다롭죠. 이는 1990년대 미국은 유럽과 달리 저숙련 노동력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통합의 실험실 : 유럽연합(EU)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 6개국(Inner Six)에서 시작된 유럽 공동체는 현재 27개국 회원국에 인구 4억 5천만 명을 거느린 거대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경제 규모는 전 세계 GDP의 약 25%로 미국과 맞먹습니다. EU는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통해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 정치적 통합까지 지향합니다. 쉥겐 조약 덕분에 여권 검사 없이 국경을 넘나들고, 유로존 19개국은 유로(Euro)라는 단일 통화를 씁니다. 비록 영국이 탈퇴(Brexit)하며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결속된 경제 블록입니다.


아시아의 패권 다툼 : CPTPP vs RCEP

우리가 사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지금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 전쟁터입니다.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는 원래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만든 TPP가 모태였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손해'라며 탈퇴해버렸죠. 좌초될 뻔한 이 모임을 일본이 주도해 살려낸 것이 CPTPP입니다. 현재 영국, 대만 등도 가입을 노리고 있습니다.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는 이에 맞서 중국이 주도하는 모임입니다. 아세안 10개국에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참여한 세계 최대의 FTA입니다. 인구만 23억 명, 전 세계 교역의 30%를 차지하는 매머드급 시장이죠.

미국과 유럽은 RCEP을 경계합니다. 중국이 아시아의 경제 규칙을 자기 입맛대로 만들어 패권을 쥐려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중국은 미국이 빠진 틈을 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죠. 이 사이에서 한국은 고민이 깊습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밀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RCEP에도 가입하고, CPTPP 가입도 고려하는 등 실리적인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은 TPP 복귀 대신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라는 새로운 판을 짜며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치며: 도시로 향하는 시선


지금까지 국가들이 어떻게 담장을 쌓고, 또 어떻게 패거리를 지어 경제 전쟁을 벌이는지 살펴봤습니다. WTO가 힘을 잃고 블록화가 심화되는 이 흐름은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에게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결국 이 거대한 경제 흐름의 결과물은 구체적인 공간에 나타납니다. 자본과 사람이 몰리는 곳, 바로 도시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모든 경제 활동이 집약되는 공간, 세계적인 기업과 자본이 모여드는 세계도시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혁신의 공간 클러스터,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도시 양극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

유로 (The Euro) (조지프 스티글리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유로화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경제 통합이 정치적 통합 없이 이루어졌을 때의 위험성을 경고함.

예정된 전쟁 (Destined For War) (그레이엄 앨리슨): 미·중 무역 전쟁을 단순한 경제 갈등이 아닌, 패권국과 신흥국의 필연적 충돌로 해석. RCEP과 CPTPP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자유무역이 선진국 기업에는 축복이지만, 제3세계 농민들에게는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옥수수 가격 폭락 등)를 고발하는 스테디셀러.


생활기록부 연계 탐구 활동

경제학, 국제통상: '메가 FTA의 득과 실 분석' - 한-EU FTA 혹은 RCEP 발효가 한국의 주력 산업(반도체, 자동차, 농업)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인 수출입 데이터 추이를 통해 분석해보기.

정치외교, 사회문화: 'USMCA의 독소조항 탐구' - USMCA에 포함된 '비시장경제국(중국)과의 FTA 금지' 조항이 한국이 참여하려는 다른 경제 협정에 어떤 외교적 시사점을 주는지 보고서 작성하기.

지리, 농업경제: '우리 식탁 위의 FTA' - 대형 마트에서 판매되는 수입 과일, 고기의 원산지를 조사하고, 해당 국가와의 FTA 체결 연도와 관세 철폐 스케줄을 조사하여 소비자 물가에 미친 영향 파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