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자유

by 초록 사과 김진우

혼자 사는 내게 친구들은 종종 소개팅을 자처한다. 대단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직은 좀 귀찮아서 정중히 거절하곤 했는데, 그러자 우연을 가장한 속 보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 낯선 남자가 앉아 있다. 아, 글쎄 마침 근처에서 전화를 했더라고. 그래도 밥은 먹여서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나왔어.... 라며 수선을 떤다. 그런 자리의 기억이 1차 산업혁명 시대 쯤 되는 듯 아득해서 어색하고 불편하다. 영혼 없는 대화만 풍선처럼 날리다가 헤어진다. 이런 일이 두세 번 반복되자 친구들도 빈정 상해했다. 소개해 줄 때가 좋은 거다, 더 늙고 힘 빠져 봐라, 그래도 마트에서 카트 끌어주고 짐 내려줄 사람은 있어야지 라며.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한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좋은 일 있다며 밥 한 번 사겠단다. 웬일로 밥 이래, 술이 아니고, 라고 놀린 다음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 같더니 옆에 또 한 명의 남자가 앉아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막 나오는데 마침 전화가 왔지 뭐야? 충주까지 왔다는데 밥은 먹여서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왔어. 괜찮지?" 아니, 이 업계에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건가? 왜 레퍼토리가 똑같아.


그럼 괜찮지....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하고 앉으며 슬쩍 그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뭐 인상은 나쁘지 않군.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재킷도 세련됐고. 건축업을 한다고 하니 초면인데도 대화는 제법 이어졌다. 중간에 화장실 다녀온다고 일어서니 키도 훌쩍하다. 고등학고 동창이라니 나 보다 4살 위겠군.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좀 머쓱하다. 오늘따라 화장이라도 좀 하고 나온 게 왜 이리 다행이냐. 아이 참 미리 귀띔이라도 하지. 마스크 때문에 대충 로션만 바르고 나올 때도 많은데, 큰일 날 뻔했네.


요즘 우리나라에도 걷기 좋은 둘레길이 많다는 얘기, 신안군에 한국판 순례길이 만들어져서 조만간 가 보려고 한다는 얘기, 나이롱이긴 하지만 오래된 가톨릭 신자라는 얘기가 굽이쳐 흐르더니, 10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왔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숨을 멈췄다. 순례길 마저 유행처럼 소비하는 게 싫어서 마음을 접었던 곳,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지인이 다녀온 후 강추하는 바람에 다시 마음이 움직여 책을 몇 권 더 찾아 읽으며 모락모락 꿈을 키우고 있는 곳이다.


내 눈이 갑자기 초롱해졌다. 식당의 테이블 사이즈는 변함이 없는데 내 몸은 한 껏 그의 앞으로 당겨졌다. 산티아고 얘기가 궁금했다. 어떤 계기로 가게 됐는지, 누구랑 갔는지, 그 이후의 삶은 어땠는지.... 10년 전 인생에서 큰 어려움을 만났다고 했다. 혼자 다녀왔고, 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꼭 다시 가 보고 싶다는 말을 붙이는데 내가 왜 설레지?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집이 분당이라는 말을 듣자 수서에서 출발 해 학교 앞을 지나간다는 경전철의 진행상황이 궁금하다.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건가?


화장실에 들려 얼굴 상태를 점검한 후 나오자 식당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른 동창 친구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미 잡혀있는 듯한 모임에 대해 얘기한다. 코로나 단계적 일상 회복 정책 덕분에 와이프들도 같이 만날 수 있다며, 서로의 와이프 참석 여부를 묻는다.


아, 뭐야 그럼... 이 사람은 진짜 그냥 우연히 충주에 온 친구였어?


*이 이야기에는 사실과 허구가 뒤 섞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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