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손, 죽이는 손

by 초록 사과 김진우

매주 토요일, 발코니의 화초들이 욕실로 이동한다. 샤워기를 틀어 물을 뿌리면 까르르 웃는다. 시원해, 맛있어, 달다 달아, 고마워, 기다렸어 등의 의미를 담은 환호성이다. 토요일 아침, 눈 뜨자마자 하는 이 습관이 체화된 지 얼마나 됐을까? 이젠 무의식적으로 하는 나 스스로에게 놀란다.


사람에게는 살리는 손, 죽이는 손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내 손은 확실히 '죽이는 쪽'이다.

20, 30대에는 아예 식물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없었고, 40대부터는 여러 계기로 도전과 노력을 반복했지만 100% 실패했다. 죽은 식물을 처리할 때 느꼈던 좌절감, 미안함, 슬픔이 극에 달했다. 아, 이제 인정하자. 포기하자.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다.


외동인 딸아이는 반려동물을 원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강아지를, 그 이후에는 고양이 입양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no'였다. 워커홀릭 독박 육아의 주체인 내게는 사람 아이 하나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선인장까지 죽어나가던 기억과 그걸 처리할 때의 자책감이 늘 생생한 자각제였다. 밤새 뒤척이다가도 아침이면 선명해졌다. 반려동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30대 중반에 결혼했다. 당시로썬 다소 늦은 편이라 먼저 결혼한 친구들로부터 온갖 얘길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중심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동거나 독립의 경험이 부족한 채 시작하는 미성숙한 커플의 결혼생활이 무사할 리 없다. 아침 드라마 막장 스토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당연한데, 그때의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삶의 동반자가 필요한 건 알겠는데 한국 남자와의 결혼은 못하겠다 싶었다. 살림, 요리, 살가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내게 친구들의 결혼생활 이야기는 지옥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나는 한국 남자와 결혼했고 아이도 하나 낳았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 대학생이 됐다. 4년 전, 1년 전에 한 마리씩 고양이를 입양했다. 토요일마다 샤워를 하는 작은 화분도 5개로 늘었다. 3년 전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포인세치아가 올 성탄에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신기하다. 내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나는 여전히 서툴고 불안하다. 조금만 바빠지면 내 일 이외의 모든 것들을 금세 귀찮아한다. 아이나 반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다루는 손길을 보면 내게는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어떤 기운이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더 나이를 먹는다 해도 내게는 오지 않을 기운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과정이야말로 내가 어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절대 내 맘대로 될 리 없고, 내가 살아온 기준에서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고,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눈곱만큼의 관용과 겸손을 배웠다. 나보다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행동했다. 소극적이고 미약하지만 그것마저 없는 내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내 아이, 고양이들, 풀풀이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