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지식,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예전에는 몰랐던 디자이너의 작품을 수업시간에 배운 다음 그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실제 공간에 등장 해 눈에 확 들어올 때마다 실감한다. 설계자에게 설명을 들으며 보는 공간은 그렇지 않은 공간에 비해 확실히 잘 보인다. 같은 영화,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경험해 보면 더 분명하다. 처음 봤을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 의자, 그 건물, 그 그림이 비로소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 맞다. 역시 공부는 중요해,라고 생각했다.
디자인 관련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혹은 인생을 좀 더 살아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뭔가 부족하다. 아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이(만) 보인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다. 적확한 표현이기도 하고 그렇게 돼야 할 것 같다. 지식 여부가 아니라 개인의 관점이 궁금해지도록.
예를 들면 이렇다. 학생들과 견학을 한 후 그날 자신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한 가지에 대해서만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면 보고서의 주제는 학생 수만큼 다양하다. 누군가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누군가는 화장실의 손잡이에, 누군가는 벽체의 구조나 재료에 꽂힌다.
책모임을 해 봐도 마찬가지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제각각이다. 다른 이가 공감했다는 어떤 내용은 그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내가 5년 전에 읽은 책을 펼쳤을 때도 마찬가지. 그때의 내가 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졌다.
학교 캠퍼스 길냥이의 먹거리를 걱정하기 시작하자 가는 곳마다 길고양이가 보인다. 그 전에는 한 번도 인식해 본 적 없던 아이들이다. 자전거로 출퇴근해 볼까 생각을 하자 주변에 온통 자전거 족이다. 길고양이 개체수가 갑자기 증가했을 리 없고 충주시내 자전거 족의 인구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원래, 언제나, 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눈에 띈 것이다. 지식이나 앎이 아니라 내 생각의 방점, 관심, 욕망, 질문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열거해 보는 것이다. 그들이 모이면 here and now의 내가 된다.
요즘 내 눈에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산행하는 사람이 보인다. 몸을 움직이는 습관을 체화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이 출간 작가라면 더욱 커다랗게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그의 달리기 습관이 보인다. 한강, 김영하의 글이나 책이 아니라 그들이 노동을 견디는 힘이 궁금하다.
지난 4월 첫 책을 냈다. 오랜 꿈이었다. 책을 쓰면서, 책을 '좋아하는 나'와 '쓰는 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나임을 알았다. 집필 노동을 가능케 할 체력 관리 없이 두 번째 책은 없다. 하루키처럼 달릴 수 있을까? 나만의 몸 관리 비결을 찾을 수 있을까? 실천할 수 있을까?
나의 몸과 마음은 평생 운동을 싫어했는데, 작가에 대한 욕망이 그걸 가능하게 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