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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07. 2017

키스신 없는 드라마

중요한 건 감동할 수 있느냐

20세기 드라마를 봤다. 

밀레니엄 시대로 진입하기 딱 일 년이 모자란 1999년 방영된 수목 미니시리즈.

기분 좋은 향수에 젖어 16부작을 며칠 만에 홀랑 해치우고, 나는 적잖이 당혹감을 느꼈다.

키스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내가 충분히 설레었다는 것.


남녀 주인공의 가장 큰 애정신을 꼽으라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포옹하는 마지막회 엔딩 장면이 전부였다.

허전해하다가 허탈해하다가, 나는 의문에 휩싸였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때는 친구라 하기에도 연인이라 하기에도 어정쩡한 '썸'을 타는 두 사람이 입 한번 맞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드라마를 가장 열심히 시청하고 행복해하던 시기가 몸도 마음도 편안한, 바로 그때였는데 말이다. 초등학생인 내가 느끼기엔 조금도 이상한 의문을 품지 않을 로맨스였을 것이다. 가진건 없어도 씩씩한 여주인공이 구두 디자이너로 성장해 나가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큰 줄거리이기에 '사랑'을 그리는 장면이 취약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은 스타일링과 상황 설정은 예쁜 여배우를 만나 풋풋한 매력으로 터져 나왔다. 그래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답답해 하기는 커녕,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얼굴을 붉히며 시청했을 거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몸도 마음도 굵어진 나는 소극적인 그들의 사랑에 목에 걸린 가시처럼 영 개운치 못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드라마=키스신이라는 표상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소위 트렌디 드라마라 불리는 청춘남녀의 꿈과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에선 키스신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화제의 1분, 순간 최고 시청률은 보통 배우들의 절절한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차지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키스하는 장면이 시청률의 중심에 있을 때가 많다. 윗몸일으키기를 하거나 사탕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흥행하는 드라마에는 패러디를 양산하는 이색적인 키스신들이 있어왔다.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부수적인 연출일 수도 있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행동은 그 자체로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의 눈을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는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가 거울처럼 반영된다는 소리일 것이다. 작가의 결과물이면서, 더불어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바를 충실하게 만족시켜 주는 매개체가 된다. 나날이 웹 환경이 발전하고 땅에 발을 딛듯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것이 일상생활이 된 요즘엔 창작자의 파워에 못지않게 우리들의 입김이 커졌다. 언제 어떤 지점에서 이 정도의 장면이 그려져야 한다는 기대가 크고 정확한 만큼, '이건 아니잖아'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어' 실망감을 답습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 속 대사가 생각났다.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는 없어. 통속은 아름다운 거란다. 
중요한 건 얼마나 진탕 울고 웃었냐는 거지.

                                                                              

                                                                                       이응준 /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中



20여 년간 연속극 작가로 일했던 어머니는 주인공 아들에게 진정한 '통속'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누구도 쉽게 비웃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세상에 널리 통하는 풍속 또는 쉽고 전문적이지 못한 일을 뜻하는 통속. 어쩌면 수많은 세월의 단면을 보아 온 어머니들에게 통속은 전혀 대중적이지도 저급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늘 못된 시어머니를 만나 고생하는 며느리와 가난한 여자에게 반하는 부잣집 아들에게 오롯이 개인적인 감정을 몰입할 수 있다는 건 수준과 세대의 차이보다 마음의 넓이인 것만 같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짜증도 외로움도 너무 많이 반복해서 겪다 보니 타인의 감정에도 공감할 수 있는 폭이 커진 것이다. 그 누구의 감정들도 허투루 대할 수 없게 감동의 그릇이 커져버린 것이다.  


키스신이 없는 드라마를 보면서 진탕 울고 웃지 못한 나는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키스신이 없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행복한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시시하고 재미없는 사랑을 한다고 치부해 버리는 건 아닐까. 마음이 둔감하고 무기력해져서 아름다운 사랑 얘기마저 어설픈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되진 않을까.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키스신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말보다는 행동, 대사보다는 시각적인 움직임이 우리의 뇌를 먼저 점령하기 때문에 이따금 내용의 전개가 막힐 때 키스신은 안전한 구원투수가 된다는 거다. 그 안전한 선택에 길들여진 감상능력은 이제 웬만큼 자극적이고 신선하지 않으면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게 됐다. 




프랑스를 여행하던 차에 초원에서 풀을 뜯는 수백 마리의 소떼를 보게 됐다. 푸른빛의 초원 속에 풀을 뜯는 어마어마한 소떼의 모습은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평화로웠던 장관은 어느새 너무 평범해져서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됐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저 들판에 보랏빛 소 한 마리가 있다면 어떨까. 또 너무 특별하고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황색 소들 틈에서 발견한 보랏빛 소는 리마커블(remarkable:주목할 만한, 뛰어난)한 상품이 된다고 세스 고딘은 생각했다. 시장에선 상상할 수 없이 예외적이고 특별한 제품이 팔린다는 유명한 마케팅 개념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 낸 보랏빛 소는 영원할 수 없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보랏빛 소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였나 보다. 시간은 멈춰있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오래된 것들이 힘을 잃는 것. 정확히 말하면 오래 바라보는 힘을 내가 잃는 것. 새로운 것은 익숙해지고 익숙한 것은 지루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내다보고 제품을 만드는 게 시장의 법칙이니까. 하지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비록 오래전 내가 좋아한 드라마에는 키스신도 없고 답답한 로맨스를 이어가지만 그래도 나는, 그래서 허전했고 그래서 마음이 간지러웠다. 


어쩌면 우린 보랏빛 소만을 쫓다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동하여 소리 내 웃고 슬피 우는 일. 황토색이건 파란색이건 빨간색이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하진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감동했느냐다. 내가 감동하지 못했다면 결코 그것은 나에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보다 많이 감동할 수 있는 일, 보다 많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일. 삶에서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또 언젠가 다시 이 드라마를 꺼내볼 그날까지, 마음속의 황색 소는 여전히 촌스럽지만 설레는 모습으로 건재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기발은커녕 보통에도 못 미치는 내 삶에도 감동해 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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