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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Dec 31. 2019

유한함이 무한함에게 건네는 위로

동화 <도깨비 할매의 꽃물 편지>

유한함을 알면서도 허무함에 빠지지 않는 마음은 얼마나 담대한가.  

-나탈리 골드버그   



노랑이는 벌통 안에서 태어난 꿀벌입니다. 줄무늬가 흐려 다른 벌보다 더 노랗게 보여 노랑이입니다.

여왕벌은 세상이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충고하지만, 아기 벌들은 나가고 싶어 안달이었어요.

찰그랑, 마침내 문이 열리던 날 벌들이 몰려나갔어요.


노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가며 깔깔거렸어요.  

“하하하! 참 재미있다.”


순간 내 마음이 환히 열립니다.


동화책을 읽다 보면 뜻하지 않은 문장에서 감동을 받곤 합니다. 주제나 사상이 담긴 글귀도 아니고, 맥락 상 중요한 의미가 깃든 곳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사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대목입니다. 남들은 쓱 훑고 지나갈 평범한 글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입니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어요. “하하하! 참 재미있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어요. 그런데 벌써 마음이 환하게 열리는 이 감동의 정체는 뭘까요.


우리 모두는 세상과의 첫 만남에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엄마 배속에서 나와 세상에 던져질 때 “하하하!” 웃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노랑이는 달랐어요. 노랑이는 단짝 왕눈이에게 말했어요.

“왕눈아, 벌로 태어나길 참 잘했지?”

  

고모 농장에서 키우던 암소를 기억합니다. 나는 축사 밖에서 암소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인간의 먹이로 길러지는 가축에 대한 연민, 곧 쇠고기가 되어 마트에 진열될 거구의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소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소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뭐야? 처음 보는 여자 인간이잖아?’

소는 나를 깔보는 눈으로 훑어보았어요.

‘내가 소인 게 자랑스러워! 저 여자처럼 보잘것없는 몸으로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어?’

소는 큼, 콧방귀를 뀌며 내게서 고개를 돌렸어요. 그리고는 혀로 마른 짚을 감아올려 질겅질겅 씹었어요.  

  

자기를 긍정하는 힘이야말로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노랑이에게도 그런 힘이 있었어요. 그 힘에 감동한 나머지 나는 멈춰 선 거였어요.

  

오늘은 어떤 꽃이 피었을까?

아침마다 노랑이는 가슴이 뛰었어요.


벌의 시계는 꽃입니다. 벌의 시간은 매화꽃에서 벚꽃으로 흘러요. 진달래꽃, 노랑제비꽃, 복숭아꽃, 찔레꽃으로 시간이 이어집니다.      

노랑이는 온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꿀을 모으러 다녔어요. 꽃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분홍색 빨간색 노란색으로 변했어요. 꽃향기에 취해 정신이 멍했어요. 그 꿀을 인간이 착취하겠지만, 그건 노랑이가 인지할 수 없는 세상 밖의 일입니다. 노랑이는 꽃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어요.

      

꿀을 모으고 돌아가는 길에 장승을 만났어요. 절 마당에 서 있는 돌장승을요. 얼굴은 닳아서 두꺼비 등처럼 우둘투둘했고, 몸에는 주름이 쭈글쭈글한 할매였어요. 할매는 일제 강점기 때 땅속에 파묻혔다 되살아났어요. 나이가 삼백 살이 넘었음에도 살아갈 날이 무한한 존재였어요.

 

한 곳에 붙박여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건 형벌이겠지요.

할매는 말했어요.

“절에 사람이 많이 와도 친구는 없어. 날마다 소원 들어주다 보면 귀가 먹먹할 지경이야.”     


세상에 태어나 몇 달 못 살고 가는 꿀벌. 노랑이는 산과 들을 여행하고 돌아와 할매 귓가에 앉았어요. 할매에게 꽃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자운영, 꿩의바람꽃, 얼레지, 노루귀 꽃으로 할매를 데려갔어요. 할매는 노랑이와 함께 꽃의 구름 위를 데굴데굴 굴렀어요.


할매가 노랑이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기가 체험할 수 없는 세상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노랑이는 자유를 가진 유한한 생명이며, 할매는 붙박여 있는 무한한 존재였어요. 이 대조가 둘 사이의 우정을 더 애틋하게 만들었어요.

     

노랑이는 개미떼에게 끌려가기도 했고, 거미줄에 걸리기도 했어요. 땅벌과 말벌과 새의 공격도 받았어요. 농약을 마시고 정신을 잃을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할매의 도술 덕분에 위기를 견뎌냈어요.

짧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어느 날 노랑이는 '가슴이 뛰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힘이 없어 날아다닐 수가 없었어요.

“엄마, 내 몸이 왜 이렇죠? 빈 껍질만 남은 것 같아요.”

"얘야, 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어."

노랑이는 '가슴이 콱 막혔어요'. 구석에 가서 소리 없이 울었어요.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어요. 다음날 노랑이는 마지막으로 할매를 만나러 갔어요.

"제가 선물 하나 드리고 갈게요."

노랑이는 담담하게 말했어요.

"저는 이제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꿀벌 한 마리가 그렇게 살다가 갔어요. 할매 장승의 아픈 다리를 고쳐주려고 자신의 소중한 일부를 주고 갔어요.(자세한 내용은 책으로 읽어보시길) 자기 몫의 삶을 명랑하게 살다 갔기에 그의 죽음이 슬프지 않아요. 도리어 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밝고 가벼워집니다. 동심에 닻을 내리고 쓴 글은, 그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도 동심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도 소중하다고, 세상에 귀하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빠짐없이 다 찾아다니라고, 할매는 말했어요. 무한한 시간 위에 붙박여 피고 지는 꽃을, 나고 자라는 생명을 바라보는 할매의 심정을 노랑이가 다는 알지 못했을 겁니다.


할매는 노랑이 잊지 못하고 꽃물로 편지를 쓰지요. 나도 노랑이를 잊지 못해 이렇게 글을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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