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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테비 May 09. 2024

토지(1), 박경리

24년 5월 9일 읽고 있는 책

작년부터 <토지> 책 읽는 사람들 소식이 보인다. 박경리 작가의 가장 유명한 토지(?)를 아직 읽지 않은 나도 기웃하게 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몽실언니> 초등학교 때 필독서로 읽었다. 그때 읽은 책 표지들은 기억나지만 내용은 가물거린다. 단지 어린 마음에 책이 재미없다(?) 읽기 편하지 않다(?) 정도였지 싶다. 막연히 나에게 어려울 것이라는 부담감에 시대소설, 역사소설을 기피했는지 모른다.


이번에 다산책방(다산북스)과 토지문화재단이 함께 토지 완간 30주년 기념으로 <박경리 작가 독서 챌린지>를 진행한다. <토지> 5기 챌린지를 모집하기에 신청했고 수락되어 이번 주부터 읽기 시작했다. 4월 말 즈음에 연락을 받았기에 책 구입이 늦어졌다. 5월 6일부터 챌린지는 시작되었지만 하루 늦은 7일부터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하루하루 읽을 분량을 아침에 정해주는데 하루 밀리니 쫓아가기가 쉽지 않다. 이번 주말에 부지런히 읽어놔야겠다.

박경리 작가 에세이도 한 번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고전을 대한다는 경건한 마음이 든다. 물성의 책이 도착하기 직전, 챌린지에 해당하지 않는 서문을 밀리의 서재로 읽었다. 어릴 때는 어려웠던 단어들이 이제는 누구보다 고혹적이며 매력적이다. 나 이런 단어들에 반하는 사람이었구나. 서문 읽으며 반하게 된 나는 에세이도 좀 찾아보고 싶었다. 소설의 문장은 소설가 기질을 잘 볼 수 있지만, 에세이는 작가 문체 그 자체를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토지> 서문을 읽는데 확 생긴다. 챌린지 활동에 가장 기본적인 미션은 매일 주어지는 분량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을 댓글로 단다. 아직 초반인 나는 마음에 드는 문장으로 귀접이할만한 부분은 없었다. 워낙 방대한 등장인물이 있기 때문에 인물 파악에 집중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느 한 부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작가가 구상하는 사투리 문장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입말로 착착 붙는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나지만 크면서 점점 사투리가 흐려지기도 하고 쓰는 단어만 집중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단어 구사능력이 나의 엄마 세대보다 훨씬 적을지 모른다.


내가 청소년을 보며 우려하는 모습은 이런 데 있다. 유튜브를 보며 핸드폰 중독도 걱정스럽지만, 입에 올리는 단어들이 매우 한정적으로 보인다. 자극적인 단어, 문장 몇 개만으로 의사소통되는 편리함에 동요나 책에 나오는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단어들은 흐려지고 있다. 며칠 전 어버이날을 맞아 나의 엄마와 우리 가족이 밥을 먹는데, 친정 엄마가 청소년에게 ‘지엽제.’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실컷 들은 그 단어를 이제는 무슨 말하나 싶어 빤히 엄마를 쳐다본다. 옆에서 나와 청소년 아버지가 통역을 해줬다. 내가 ‘지엽제를 몰라?’ 물었더니 모르겠단다. 이런. 나는 왜 이런 단어의 소실에 안타까운지. 나는 뭐 그리 대단하게 말을 한다고 스스로가 안타까운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동시전문 계간지 <동시먹는 달팽이>를 읽고 후기 쓸 일이 있었다. 2024년 봄호로 ‘백 년 전 어린이들이 쓴 시 감상하기’가 특집으로 실려 있었다. 1924년 동시를 언제 감상할 수 있을까. <신소년>, <어린이>에 실린 전문을 옮겨 온 몇 편의 시 중 ’재미스러‘, ’허잽이‘, ’방싯방싯‘, ’꾹꾸꾸꾸‘, ’소경’ ‘슬피 웁니다’ 같은 소박한 단어에 마음이 풀린다. 경직되는 단어들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단어로 나에게 온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거나 나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우리는 순박함이라는 생활 풍경을 떠올리며 내가 쓰는 획일화된 단어들을 꼬집는다. 단어 공부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도 하지만, 부지런함이 없을 텐데 마음만 앞선다.


가을이 오면 재미스러

나는 나는 가을 오면
밭에 가서 콩 꺽어다
솥에 넣고 부글부글
쩌 먹는 게 재미스러

나는 나는 가을 오면
산에 올라 밤 따다가
부모형제 우물우물
까 먹는 게 재미스러

-이암이(태안공립보통학교 13세), [가을이 오면 재미스러] 1, 2연 <신소년> 1923, 11월호

허잽이

허잽이(=허수아비)야, 허잽이야
잠도 없는 허잽이야
어머니를 기다리나
밤낮 없이 우뚝우뚝

허잽이야 허잽이야
길 몰라서 헤매일 때
네게 물어 갈라는데
말 못하고 우뚝우뚝
 
-김용진(매동고등보통학교 3학년), [허잽이] 전문<어린이> 1924, 2월호

<동시먹는 달팽이 계간 202년 봄호 중>


좋았던 토지 서문은 아래와 같다.


9쪽(<<토지>>를 쓰던 세월 중)
치열하게 살지 않는 목숨은 없다. 어떠한 미물의 목숨이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프다. 끝없는 환란의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 죽음과 탄생, 만남과 이별, 아름다움과 추악한 것, 환희와 비애, 희망과 절망, 요행과 불운, 그러한 모든 모순을 수용하고 껴안으며 사는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삶 그 자체만큼 진실된 것도 없다. 문학은 그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는가.

13쪽(2002년판 <<토지>>를 내며 중)
지리산의 한에 대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오랜 옛적부터 지리산을 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함께해 왔으며, 핍박받고 가난하고 쫒기는 사람, 각기 사연을 안고 숨어드는 생명들을 산은 넓은 품으로 싸안았고 동족상쟁으로 피 흐르던 곳, 하며 횡설수설하는데 별안간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것 같았다.

17쪽(서문 중)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술술 넘어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서문을 읽으며 반했던 마음으로 끝까지 읽을 힘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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