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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body Dec 03. 2020

나의 웃픈 수능 시험 이야기

10년 전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걸어서는 25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보았다. 평소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던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비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30cm 자로 손바닥을 때리는 종합학원을 다녔는데 그날이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7년 동안 공부한 것을 평가받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생각인지.



아침 일찍 엄마와 할머니, 오빠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텅 빈 버스를 타고 '오금고등학교'라고 하얀색 A4가 붙어있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정거장을 가서 내린 후 학교를 향해 열심히 걸었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수능을 잘 보라고 응원 온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 부모님들을 보며 좋은 기운을 받았다. 하, 잘 봐야지.



1교시 언어 영역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나라말로 대화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듣기 평가가 너무 어려워서 멘붕이 왔다. 그래도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덜덜 거리며 시험을 봤다. 망한 것 같다.



2교시 수리 영역

가장 좋아하는 수학이었는데, 쉬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시간이 부족했다. 싸하다.



점심시간에 같은 수험장으로 배정된 친한 친구랑 같이 밥을 먹었는데 밥이 코로 넘어갔는지 어디로 넘어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언어 영역 듣기 평가 5문제를 다 틀린 것 같아서 너무 우울했다. 진지하게 이대로 집에 갈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봐보자고 생각했다.



3교시 외국어 영역

듣기가 너무 어렵다. 안 들렸다. 듣기 평가가 끝난 다음에는 심장이 병에 걸린 사람처럼 너무 빨리 뛰어서 외국어 영역을 푸는 내내 왼손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시험을 봤다. 울고 싶었다.



4교시 사탐 영역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회문화는 그래도 평소처럼 잘 풀고 윤리와 사상도 평범하게 풀었던 것 같다.



5교시 아랍어

3번으로 모두 찍고 멍 때렸다. 아랍어 공부는 하나도 안 했는데 5교시를 선택한 이유는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5교시까지 봐서 그 수험장에 배정받아야 분위기가 좋다는 그런 말을 들어서였다. 진짜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친구와 망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왔는데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집에 있을 엄마랑 할머니, 가족들이 생각났다. 시험 진짜 망했는데 어떡하지... 버스를 타고 갈 기운도 안 났다.



그래서 25분을 걸어갔다. 건너는 데 5분 정도 걸리는 다리를 건너면서 슬픈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다. 이렇게까지 시험을 못 본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소리 내면서 울다가 집에 들어가기 직전, 가족들을 보기 전에 울었던 티를 내지 않으려고 거울을 보면서 얼굴을 팡팡 두드렸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한없이 추웠던 바깥공기와는 달리 훅 하게 덥혀둔 집안 공기가 나를 반겼고, 한층 들떠있는 엄마랑 할머니가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딸, 우리 손녀 고생했네.' 하시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나를 보며 엄마랑 할머니는 당황하셨고 결국 나는 꺼이꺼이 목 놓아 울고, 땅을 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난 이제 어떡해' 곡소리를 내며 세상이 떠내려가라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코미디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펑펑 눈물을 쏟아본 적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보는 본인까지 눈물이 난다면서 그만 울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겨우겨우 눈물을 거두고 일단 현관을 벗어나, 내 방 침대에 누워서 다시 한번 펑펑 울었다.

 


그러다가 오빠가 답 나왔다고 가채점해보라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채점을 해보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방실방실 웃었다. 그야말로 일희일비의 아이콘. 그렇게 나는 하루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고 그날 무사히 지나갔다.



주절주절 이 글을 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모른다는 , 그리고 수능이 절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9년 동안 1살부터 19살 때까지 산 19년보다 더 다양하고 즐겁고 행복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인생 길고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수능 시험, 지금 정말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못 보았다고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능 성적을 비관해서 목숨을 끊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20살부터 온전히 성인으로서 자유가 주어지니까 적어도 1~2년은 한번 살아보자. 언니, 누나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다.



수능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기나긴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정말 힘든 과정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좌절했던 나의 마음도 조금은 무뎌지고, 새로운 기회는 내가 기운을 차리면 도처에 널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이 있듯 희망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험생 여러분,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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